소설 보다 : 가을 2021 소설 보다
구소현.권혜영.이주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일요일, 느지막이 일어나 『소설 보다 : 가을 2021』을 펼쳐 들었다. 오늘이 일요일이어서 다행이야 하는 생각과 함께. 토요일은 내내 자고 그나마 일요일이 되어야 책을 펼칠 힘이 난다, 요즘에는. 숫자 강박이 있는 나로서는 한 달에 열다섯 권 정도를 읽자는 다짐에 그걸 지키지 못하면 괴로워했다. 지금은. 포기했다. 한 달에 다섯 권 읽으면 많이 읽는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다섯 권 밖에 읽지 못해서 살아가는 것에 위축이 된다. 그게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아서.


『소설 보다 : 가을 2021』에 실린 세 편의 소설 중 무엇을 먼저 읽을까 고민했다. 순서대로 읽긴 싫었다. 경험상 보다 시리즈는 처음부터 읽기보단 후루룩 넘기다가 어떤 문장이 눈에 들어오면 그 소설부터 읽으면 된다. 그러면 실패가 없다. 내 기분과 내 취향이 맞지 않는 소설이 간혹 있어서 인내하듯 읽었다, 몇 편은. 환한 낮의 독서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위로받기 위한 소설이 필요하다.


우주가 도왔을까,는 아니고. 세 편의 소설 모두 마음에 들었다. 너덜거리는 정신을 구해주었다. 해보자,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 손뼉을 치며 말해주는 것 같은 세 편의 소설이었다. 권혜영의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는 소설도 좋았지만 평론가와 작가가 대담을 나누는 부분이 더 좋았다. 권혜영의 말. 본인은 상근직 하면서 글을 쓰지 못한다고. 글은커녕 책을 읽을 힘도 쓰지 못한다고. 등단기를 읽는 걸 좋아한다.


일하고 퇴근하고 와서 글을 써 등단을 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 대단하고 부럽다. 씁쓸하기도 하다.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는데 대체 너는 뭘 하고 있냐는 질책을 받는 것 같아서. 이런 감정 느낄 필요도 없는데.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괜한 자격지심 때문에 느끼는 자기혐오의 마음. 권혜영은 그런 마음을 엷게 해 주었다.


나는 하루에 일곱 시간 이상은 자야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이 도는 사람인데. 다섯 시간 자도 괜찮다. 미라클 모닝, 이러니까. 겨우 '워라밸'을 맞춰서 저녁에 여유가 좀 생길라치면 취미를 만들래요.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래요. 아니, 저녁 먹고 늘어지게 있다가 그냥 씻고 자면 안 되나. 대충 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데. 저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세상의 이런 지점들이 숨 가쁘게 다가오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소설 보다 : 가을 2021』中에서, 권혜영의 말)


권혜영의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 없다」는 교대 근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온 '나'가 화재 경보 소리를 들으면서 경험하는 대략 난감한 상황을 그린다. 통장을 스치고 지나가는 돈을 위해 뼈가 녹도록 일하다가 겨우 잠에 들었다. 불이 난 건지 잘못 울린 건지 모를 소리에 계단을 향해 내려가면서도 일층에 도착해 다시 올라가면 몇 시간을 잘 수 있는지 생각한다. 지독한 현실이다.


「시트론 호러」에서 구소현은 귀여운 귀신을 만들었다. 책을 좋아하는 귀신. 도서관과 서점을 부유하면서 책을 읽는 누군가 옆으로 간다. 귀신 공선은 독서 메이트를 찾아 방황하다가 효주를 발견한다. 효주는 한 번 잡은 책은 재미가 있든 없든 끝까지 보는 성격이다. 나 같다. 어느 날부터 효주는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고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공선은 착잡함을 감출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쓰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소설의 원형이다, 「시트론 호러」는.


이주란을 왜 좋아할까를 생각한다. 「위해」를 읽다 보니 알겠더라. 이주란은 어려운 마음을 설명하기 힘든 기분을 묘사하는데 탁월하다. 가난의 마음과 가난 때문에 힘든 기분. 도움을 받고 싶지만 받으면 안 될 것 같기에 망설이는 하루들. 친구 집에 찾아갔다가 어렵게 길을 찾아서 돌아오는 하루. 옆집에 사는 아이를 도와주고 싶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는 하루. 위로받고 싶어서 타인을 먼저 위로하는 하루. 「위해」에는 그런 하루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가을 지나 겨울. 메일로 『소설보다 겨울 : 2021』이 나왔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장바구니에 담는다. 이번 주는 기쁘고 슬펐다가 다시 기뻤다. 감정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실체도 없는 감정과 기분 때문에 나를 망치고 싶지 않은데. 책을 많이 읽고 꾸준히 글을 쓰는 일의 생각. 위해의 마음은 그걸로 된다. 맛있는 거 먹고 청소하고 책 잠깐 읽다가 낮잠을 길게 자는 하루. 내가 기대하는 건 그런 하루의 축적이다.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인간이라서 좋은 시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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