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1980년경에 썼다. 무심이 동해안의 모 고등학교 교사였을 때다. 망연히 흘러가는 남대천을 어느 날 지켜보다가, 문득 어떤 구상이 떠올라 이 소설을 쓴 것이다. 그 때 제목이 이었고 분량은 200자 원고지로 50 매쯤이었다. 지금도 동해안에 있는, 40년 넘는 설악문우회의 회지갈뫼지에 발표했다.

그 후 무심은 춘천의 모 고등학교로 전근온 뒤인 198311월경, 분량을 약 80 매로 보완하는 한편 제목도 사초(史草)’ 라고 바꾼 뒤 중앙의 모 일간지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그 때 이런 결심을 했던 기억이다.

만일 당선되면 그걸 핑계로 교직을 사표내고 나와 전업 작가로 사는 거다.”

돌이켜보면 만용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으나 사초라는 제목이 작품 내용에 걸맞지 않다는 심사위원의 평과 함께 탈락한 것이다. 낙망한 무심은결국 내 팔자는 교사로 살아야하는가 보다체념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세월이 흘러 2000년 경에 공동경비구역 JSA ’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무심은 우연히 그 예고편을 보곤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소설  '사초'와 줄거리가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병사들이 국경 근처에서 벌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란성 쌍둥이 같았다. 기분이 나빠 그 후 무심은 지금까지 그 영화를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상연이란 분이 1996, ‘DMZ’란 소설을 세계의 문학이란 문학지에 발표했는데 이를 박찬욱 감독이 2000년에 각색하여 연출해 나온 영화라 했다.

 

무심은 2004년 봄에 교직을 명퇴했다. 더 늦기 전에 소설을 써보기로 한 것이다. 역시 교직을 명퇴한 한 친구한테 1983년의 사초’  원고를 한 번 보여주었다. 그 친구가 다 읽고 나서 말했다.

감동적인 소설이다! 그런데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와 줄거리가 흡사하다.”

그 말에 무심은 다시 이 작품을 서재에 처박아두었다. 그러다가 요즈음 들어 생각을 바꿨다. ‘그 작품이 불쌍하다. 블로그에라도 올려 세상의 빛을 보게 하자.’

하여 이번에 가뭄’ 으로 이름을 바꿔 블로그에 올렸다. 다만 30여 년 전 작품이라 구식 문장들을 며칠 다듬어야 했다.

 

이 기회에 재차 밝히는 것은 이 작품이 공동경비구역 JSA’보다 최소한 십 년 이상 앞섰다는 사실이다. 이를 입증할 수도 있는데 1980년 경 발간된 설악문우회의 갈뫼지가 그것이며 1983년 중앙의 모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 심사평이 그것이다. 시간을 내어 찾고자 하면 나올 수 있는 근거들이다. 물론 무심에게도, 오래 되어 원고지들이 누렇게 빛바랜 사초원고도 있다.

 

 

제목을 이라 했다가  사초라 했다가  가뭄으로 자리 잡았듯이, 30여 년 흐르는 동안 다소 기구한 운명을 겪은 작품이다. 하지만 무심은 요 며칠 동안 이 작품을 다듬으면서 특히,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자신도 모르게 감명을 받았다. 자기 작품에 자기가 감명 받다니, 요즈음 말로 자뻑일 수 있다. 어쨌든 자신의 여러 한() 중 하나를 그나마 푼 듯하다.

 

이런 생각들을 해 본 적이 있다.

이 작품이 1983년 신춘문예 투고 때 당선되었더라면, 그래서 교직을 사표 내고 전업작가로 나섰다면 내 삶의 행로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작품이 1983년에 당선되지 못한 것은 제목 때문이 아니라, 당시 남북관계가 몹시 안 좋던 시기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이라는, 박상연 작가의 ‘DMZ’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솔직히 그럴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과 무심 작품이 흡사한 것은, 세대를 격했지만 분단된 땅에서 살고 있다는 동질감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연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기구한 역정의 이 작품에 무심은 할 말이 많다. 하지만 그만 적기로 한다. 불원간 친구를 만나 막걸리 한 잔 나누는 것으로 뒤늦은 뒤풀이라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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