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연 선생은 그날 밤 사건의 현장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부지런히, 얇은 스웨터를 걸친 뒤 주방에 있는 아내한테 갔다.

여보. 오늘 내가 차를 쓸 일이 있어.”

당신도 참, 오늘 수요일은 내가 성당 교우 분들을 차로 모시고 봉사활동 가는 날이잖아요.”

차가 있는 다른 신자 분을 찾든지 아니면 택시 타고 다니든지 그래.”

김 선생이 교직을 퇴직한 지 3년여, ‘웬만하면 걸어 다니며 노년의 건강을 지키기로 하면서 그동안 차는 성당 다니는 아내의 독차지였다. 다시 반격에 나선 아내.

당신이야말로 택시를 타면 되잖아요.”

몇 백 리, 장거리를 가야 하는데?”

그럼, 버스 타고 가면 되잖아요?”

아니야. 이번에는 반드시 자가용차를 몰고 가야 해. 자세한 것은 저녁 때 돌아와서 말해줄게.”

대체, 어디를 가는 거에요?”

갔다 와서 말한다니까!”

김 선생은 부리나케 현관문을 여닫고 밖으로 나섰다. 솔직히, 중요하거나 시급한 일로 자가용차를 몰고 가는 게 아니라서 계속 대화를 이었다가는 책잡힐 우려가 컸다.

충청북도 음성군 운포면 희망리.”

차를 몰고 아파트 구내를 벗어나면서 김 선생은 잊지 못할 그 주소를 뇌까려 보았다. 그날 밤 사건이 벌어진 외갓집 동네의 주소다.

교통 정체가 심한 춘천 시가지를 벗어나자 바로 널찍한 중앙고속도로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만 하다.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지금과 달리, 40여 년 전 외갓집 가는 길은 힘겨운 고생길이었다. 시외버스니, 완행버스니 하는 대중교통수단을 세 번씩이나 갈아타고 가야 하는 데다가 하루 종일 걸렸다. 시가지 같은 경우에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었지만 시가지를 벗어나면 흙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비포장 신작로일 뿐이었다. 신작로 길은 왕복 2차선으로 좁을 뿐만 아니라 굽이마저 잦아서 어린 학생이던 그는 차멀미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버스 안 바닥에 토할 위기를 모면한 것은, 그나마 버스가 자주 정차한 덕분이었다. ‘공용 터미널이나 종합교통 영업소란 데에 정차할 때마다 급히 구내 화장실을 찾아 와아악!’ 토해 버리던 추억, 아니 기억이 그에게 있다.

지금은 얼마나 좋은 찻길인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로 가다가 제천쯤에서부터 국도로 가는 건데 이제는 왕복 2차선 국도조차 굽이도 거의 없을뿐더러 아스팔트로 다 포장돼 있을 게다. 혹 멀미라도 나면 도로 변 휴게소를 찾으면 되고, 걸리는 시간도 하루 종일이 아니라 두어 시간이면 충분할 듯싶다. 자가용차가 아니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렇다. 이런 맛을 보려고 오늘 자가용을 고집한 것이다. 아무렴, 40여 년 간 발길을 끊었던 그날 밤 사건 현장을 찾아가는데 최소한 자가용차는 몰고 가야 되지 않겠나.

40여 년, 정확히는 45년이다. 오래도 발길을 끊었다.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궁금한 숙제 하나를 남겨놓고 눈 감게 될지도 모른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충청북도 음성군 운포면 희망리지도가 선하게 떠올랐다. 45 년 전의 공간이 확인된 셈인데 그렇다면 그 날 밤 사건의 공간은 그대로 남고 시간만 엄청 흐른 거라 말할 수 있을까?

 

그 해 1968년은, 나중에 알았지만, 거국적인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2년 전이었다.

그 해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혼자충청북도 외갓집으로 떠난 것이다. 당시 부모님은 여름방학만 되면 오남매의 장남인 그와 장녀인 누나 중 한 사람을 반드시 충청북도 외갓집에 보냈다. 방학 중 시골 외갓집에서 자연과 어우러지며 무언가 배우고 오라는, 고상한 교육 차원의 배려가 아니었다. 두 달 터울인 그와 누나가 툭하면 비좁은 방구석에서 말다툼을 벌이니 그게 지겨워 하나라도 딴 데로 보내자는 격리 차원이었다.

그 시절 춘천 지방은 겨울에는 춥기로, 여름에는 무덥기로 전국에서 악명이 높았다. 그러잖아도 비좁은 집에서 일곱 식구가 그 무더운 여름을 조금이라도 덜 짜증나게 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게다. 방이 둘 뿐인 그 집조차 독채 전세로 얻은 남의 집이었으니 돌이켜보면 기가 막힌다.

비만 오면 진창바닥인 춘천 교통 여객 영업소에서 우선, 원주로 가는 시외버스표를 끊으며 그의 외갓집 여행은 시작되었다. 짐이라고 해야 책가방에 챙긴 ‘AW메들리 영어 참고서’ , 영어사전, 그리고 양치도구 정도였다. 갈아입을 속옷 같은 것은 외삼촌 것을 입으면 되니 별 걱정이 없었다.

방학 한 달을 외갓집에서 보낸다 해도 달라질 게 없는 그의 생활이었다. 집에서 하던 영어 공부를 외갓집에서도 변함없이 잇는 것이다. 특히 당수 수련도 계속했다. 태권도를 그 시절에는 당수라 했다. 그가 당수를 독학하게 되면서 결국 그날 밤 사건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그는 당수를 독학 하던 45 년 전 추억에 잠기며 운전한다.

 

그 시절 그가 사는 집은 춘천 봉의산 바로 아래 달동네였다.

어느 날 달동네에 당수 도장이 문을 열었다. 방치된 폐건물을 활용한 도장에서 30대 중반 나이로 보이는 사범이 저녁마다 당수를 가르쳤다. 수련생은 열 명이 채 안 됐는데 홍보 효과를 노렸는지 도장 창문을 모두 열어놓아, 외부 사람들이 당수 수련 모습을 밖에서도 볼 수 있게 했다.

그런 외부 사람들 틈에 그가 있었다. 사범이 하늘을 날 것처럼 공중으로 겅중 뜀과 동시에 몸을 옆으로 돌려 발차기하는’ 2단 옆차기라든가, 정권 치기라 하여 주먹을 단단히 쥐고서 온 힘을 다하여 두꺼운 송판을 격파하는 동작은 언제나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정말 그는 당수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려면 입회비를 마련해야 했다.

간판도 달지 못한 데다가, 벽의 흙이 드러나도 회칠 하나 못한 당수 도장이니 입회비가 비쌀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그는 입회비 얘기를 부모님한테 꺼낼 수가 없었다. 실직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시내의 식당 두 군데를 다니면서 가족들 생계를 해결하는 우울한 집안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그는 당수를 독학하기로 했다. 도장 창 밖에서 눈여겨본 당수 동작들을 집에 와 복습하는 형태다. 늦은 밤 시간에 집 뒤란으로 혼자 나와 30여 분씩 당수 동작들을 재연하는 것이다. 어두운 데에서 남몰래 하는 짓이었지만 식구들 눈에 안 뜨일 리가 없었다. 시내 다방에 죽치고 앉아 하루 종일 사업을 구상하다가 귀가한 아버지 눈에 뜨인 게 그 첫 번째였다.

너 지금 뭐하냐?”

어둠 속에서 겅중겅중 뛰는 웬 사람에 기겁했다가, 조심스레 살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의 아들이라는 게 확인되자 안심하면서 던지는 첫 질문이다.

사실, 아버지보다 더 놀란 그였다. 2단 옆차기를 하려다가 아버지의 등장에 놀라 발목을 접질리고 만 것이다. 그는 몹시 아픈 발목을 참고서,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답했다.

학교 오갈 때, 깡패새끼들이 많아서, 그래서 혼자, 당수 연습하고 있어요.”

그러자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헛 참, 녀석도!’ 하는 표정으로 돌아서는 아버지. 돌이켜보면 참 가난한 부자지간이었다.

그는 지금 운전 중인데도 가슴이 먹먹해져서 액셀러레이터 밟는 것을 잠시 잊었다. 차가 제 속도를 잃고 느려지자 뒤따르던 차들이 빠바방! 경적을 요란하게 내며 추월해 간다.

, 내가 운전하고 있었지

그는 기겁해 액셀러레이터를 다시 밟으며 제 속도를 찾았다.

 

얼결에 한 대답이지만 그 무렵의 춘천에는 정말 깡패새끼들이 많았다. 시내 지역을 반 가까이 점한 거대한 넓이의 미군부대를 위시해 공병부대니 군단사령부니, 한국군의 여러 부대들까지 포진한 군사도시라서 그럴까? 미군들을 상대하는 양공주 촌에다가 일반인들 상대의 사창가까지 시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가운데 그에 빌붙어 먹고 사는 기둥서방이라 할, 눈매 사나운 깡패들이 많았다.

그런 시내 분위기에 편승해, 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애들이 잭나이프 같은 흉기를 갖고 다니며 골목 같은 후미진 장소에서 또래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품 갈취하는 일도 잦았다.

그는 그런 범죄의 피해를 본 적은 없었다. 등하교를 할 때 항상 주의해서 큰 길로 다녔기 때문이다. 막 되먹은 깡패들이라 해도 큰 길에서까지 못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의 치안은 최소한 유지되던 춘천이라 할까.

여하튼 그 날 밤 얼결에 아버지한테 그런 대답을 한 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정말, 깡패새끼들을 만나면 멋지게 해치우고 말겠다는 의지까지 난데없이 생겨나 더욱 열심히 매일 밤 당수를 독학했다. 그러던 중에 1968년 여름방학을 맞아,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 사는 충청도 외갓집으로 혼자 가게 된 것이다.

 

그의 차는 홍천 외곽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쌀쌀한 바깥 날씨임에도 차 안은 덥다. 늦가을, 따가운 햇살 때문이다. 그는 버튼을 눌러 조수석 쪽 창을 반쯤 내렸다. 싸늘한 바깥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면서 덥던 실내가 얼마 안 가 완화되었다.

 

춘천 집의 좁은 뒤란에서 당수를 수련하기는 편치 않았다. 특히 2단 옆차기처럼 일정 거리를 날아야 할 때는 담벼락과 집채 사이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동작해야 했다.

외갓집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뒷동산에, 큰 나무들 사이로 제법 널찍한 풀밭이 있어서 그곳을 도장 삼아 마음 놓고 활개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듯하게 자란 굵은 소나무를 하나 택해 새끼줄로 둘둘 감아놓으니 정권 치기나 손바닥을 날 세운 수도 치기를 연습하기도 제격이었다. 물론 싸움 상대의 머리 부분쯤이라 여기고서 발차기 하기도 좋았다.

시간을 늘려, 하루에 한 시간씩 뒷동산에서 당수 수련도 하고, ‘이번 방학 동안에 나머지 반을 다 떼자는 결심으로 챙겨온 두꺼운 ‘AW메들리영어 참고서도 다섯 페이지씩 진도를 나가고, 정말, 오랜만에 알차게 보내는 여름방학 같았다.

만일 춘천 집에 있었더라면 5남매가 함께 쓰던 그 좁은 방에서 누나나 동생들에 부대껴 영어 공부는커녕 뒤란에서 하는 당수 수련도 여의치 않았을 게다. 바로 밑에 동생 녀석이 형을 따라 자기도 당수 하겠다며 한참 성가시게 굴던 참이었으니까. 춘천 집의 형편을 생각한다면 방학 한 달간이라도 외가로 놀러오기는 아주 잘한 일이었다.

 

작은 동산이지만 제법 많은 나무들에다가, 수풀도 우거져 그의 당수 독학 광경은 웬만해서는 사람들 눈에 뜨일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일주일쯤 지났을 때 동네 아이 눈에 뜨이고 말았는데 결국 그날 밤 사건의 태동(胎動)이라 할 만하다.

그 아이는 소 먹일 꼴 베러 산에 올랐다가 난데없는 당수 수련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같은 또래라 동네 길에서 마주치면 눈짓인사는 나누던 사이였다.

야아, 대단하구나야!”

그 아이는 감탄하며 서 있었다. 앞발차기 동작을 하던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계속했는데, 언젠가는 동네 사람들 눈에 띌 거라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서너 번 더, 소나무에 새끼줄을 감아놓은 눈높이 위치를 겨냥해 앞발차기를 연습한 뒤 그는 비로소 그 아이를 제대로 보며 말했다.

왔어?”

그런 뒤 다시 몸을 움직여 2단 옆차기를 실시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당수 동작 중 가장 멋진 동작에, 그 아이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같은 동작을 네 번이나 하자 금세 온몸이 땀에 젖었다. 그가 소맷자락으로 목덜미의 땀부터 닦을 때 그 아이가 감탄의 표정이 여전한 채 물었다.

니가 지금 한 게, 그 뭐야, 당수? 그런 기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허구까지 술술 지어내고 말았다.

내가 도장에서 당수 배운 지 1년이 넘었어. 1단이지. , 여기 시골에서는 잘 모를 테지만 춘천 바닥에는 깡패새끼들이 득실거리거든. 그래서 그 새끼들이 돈을 달라고 까불면, 까짓 거, 내가 당수로 콱 조지는 거지. 몇 놈 잘 조졌지, 지금까지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방학 때도 늘 당수를 연마해 두어야 해.”

 

돌이켜보면 그는 당시에 이미 소설가 기질을 보였던 게 아닐까? 환갑 가까운 나이에 모 문학지에 소설 두 편을 발표하는 둥, 뒤늦게 소설가의 면모를 갖춰 가고 있다.

아내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구한다는 전도차원에서 성당에 데려가려고 할 때마다 그는 당신, 내가 그리도 한가해 보여? , 요즈음 작품을 구상하느라 머릿속이 여간 바쁜 게 아냐!’하는 말로써 사절한다. 그런 뒤 속으로 정말, 내가 소설가로 등단하지 않았더라면 애먹을 뻔했다.’고 안심한다. 성당이 싫은 게 아니라 특정 공간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 게, 생각만 해도 못 견디겠는 거다. 교직에 재직할 때에도 그는 강습이라든지 교장의 특별 훈화같이 꼼짝달싹 못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을 아주 못 견뎌했다. 그 때문일까, 승진과는 거리가 먼 평교사로 퇴직하고 말았다. 그의 잠재의식 속에, 한창 자랄 때 그 좁은 방 한 칸에서 누나나 형제들과 함께 지내느라 몹시 힘들었던 경험이 역력하게 남아서 빚어진 일들이 아닐까?

지금 차는 홍천과 횡성 사이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삼마치재 터널이다.

 

산에서 당수를 연습하다가 동네 아이한테 목격된 다음 날 밤이다.

달빛 한 점 없이 어두운 그 밤에 동네의 또래 애들 대여섯이 그를 찾아 왔다. 늘 열려 있는 사립문이니 그냥 마당 한복판으로 들어와, 방안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는 그를 부른 것이다.

보옹길아! 보옹길아!”

봉길(鳳吉)이란 다소 촌스런 이름은 그의 아명인데 춘천 집과 여기 충청도 외가에서 쓰이고 있다. 물론 친척 어른들도 그리 부른다. 족보의 항렬을 따라 점잖게 지은 준연(俊淵)’이란 호적상의 이름은 학교를 중심으로 한 공식적인 공간에서 쓰인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보던 만화책을 놓고 일어나려는데 외할머니가 먼저 방문 열고 내다보며 말했다.

우리 봉길이는 왜 찾냐?”

집단으로 위해하려는가 싶어 카랑카랑하게 묻는 말이다. 그러자 동네 애들 중 어제 낮의 그 아이가 방에서 새나오는 백열등 불빛에 제 모습을 드러내며 공손한 어조로 답했다.

물고기 잡으러 같이 가려구야.”

우리 봉길이는…… 공부해야 되는데?”

그런 할머니가 민망스럽게도 그가 실마루로 나서며 말했다.

할머니. 공부는 낮에 다 했어. 쟤네들을 따라가서 물고기 잡는 것 좀 구경하다가 올게.”

그러잖아도 그는 외삼촌의 헌 만화책이나 들척이며 밤 시간을 보내느라 따분했다.

개구리들이 사방에서 와글와글 시끄런 논두렁길.

한 아이가 막대 끝에 낡은 천을 감아 만든 횃불을 쳐들어 앞길을 밝히는 가운데 동네 애들과 그는 행렬을 이루어 강으로 향했다. 어제 낮의 그 아이가 이제 강가에 가면 봉길이가 당수를 보여줄 테니까 잘들 보라구야!’ 연실 떠들었다.

몇 년째 여름방학 때마다 보는 얼굴들이지만 함께 어울리기는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이 날 밤은 신고식이 치러지는 순간이었다. ‘당수 한 번 제대로 보여주자는 생각에 그의 손아귀에 땀이 배었다.

강물이 강바닥의 자갈들에 부딪히며 흐르는 절절절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강가에 도착했다.

횃불이 짙은 어둠을 간신히 밀어내며 만들어낸 일정 부분의 모래밭 공간. 한복판에 그가 대련 자세로 서고, 동네 애들은 넉넉한 거리로 삥 둘러앉았다. 그는 마침내 야압!’ 기합소리를 내며 2단 옆차기를 시연했다. 발이 빠지는 모래밭이라 동작하기가 불편했지만 혼신을 다 해 멋지게 해냈다.

와하!”

동네 애들이 탄성을 질렀다. 우쭐해진 그는 한 번 더 2단 옆차기를 해 보이곤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다른 동작들도 있지만, 이쯤 할게. 다음에 기회가, 다시 있을 때, 그 때 보여줄게.”

한 아이가 말했다.

우리한테 당수 좀 가르쳐 주면 안 되겠냐?”

생각지도 못한 부담스런 요청이다. 그의 당수라는 게 너덧 가지 동작에 불과할 뿐더러 그조차도 창 너머로 익힌 독학이다. 그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다른 아이가 그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이런 새끼 같으니라고. 당수 같은 무술은 훤한 낮에 배워야 할 텐데 우리가 낮에 언제 그럴 시간이 있냐? 밭의 김도 매고 논의 피도 뽑고 소 먹일 꼴도 베고 돼지거름도 치고…… 종일 일하다 보면 금방 어두운데 언제 당수를 배워?”

또 다른 아이가 상황을 정리했다.

아니 강에 와서 뭐하는 기야? 빨리 물고기나 잡자고야.”

강이라고는 하나 깊어야 무릎까지 물이 닿는 정도다. 춘천의 소양강에 비하면 강이 아니라 하천이라 불러야 했다. 어쨌든 그는 동네 아이들을 따라 무릎 위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강물로 들어갔다. 물고기 잡기가 시작된 거다. 횃불을 든 아이가 천천히 나아가는 뒤로 따라들 가면서, 눈에 뜨이는 물고기를 손으로 잡는 방식이다. 미꾸라지 꺽지 퉁가리가 느닷없이 어둠 속에 등장한 환한 불빛에 놀라, 마치 강바닥에 얼어붙은 듯 그대로 있었다. 흐르는 물살 아래 그러고 있는 물고기를 손으로 조용히 접근해 움켜쥐면 되었다. 잡는 대로, 한 아이가 든 주전자에 담으며 강바닥을 누볐다.

횃불이 사그라질 즈음에 물고기 잡기를 마치고 강가로 나왔다. 모닥불에 삥 둘러앉아 먹고 마시며 노는 일이 이어졌다. 주전자에 든 물고기들을 한 마리씩 꺼내 밸을 따 날로 먹고는 소주를 마시는 거다. 그는, 불에 구운 것도 아니고 날로 먹는 물고기라 망설였지만 결국은 입안에 넣어 억지로 으직으직씹어 먹고 말았다. 혼자 예외가 되기 어려운, 전체 분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고소한 물고기 맛이라니! 그 다음, 옆의 아이가 건네는 술병을 받아 병나발을 한 모금 정도 불었더니 이내 취기가 올랐다. 애들이 준비해 온 소주가 댓병으로 다섯 개나 되었다. 취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부르는 유행가.

사아나이 가아슴에도 눈무울은 있다아. 이이렇게 정을 주우우고 떠어나……’ ‘다앙신과 나아 사이에에 즈어 바다가 읎었다아면 쓰으라린 이벼얼은……’ ‘삼각찌이 로오타리에 궂은비는 오오느은데……

나중에는 합창으로 바뀌었다. 누군가가 내놓은 담뱃갑에서 한 개비씩 꺼내 피워 물자 밤하늘로 어지럽게 흩어지는 허연 담배연기들.

사실, 그는 지난 봄 학교 소풍 때 반 친구가 가방에 숨겨 갖고 온 미제 캔 맥주를 하나 마셔 본 게 음주 경험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드러내놓고 독한 소주를 연실 마시고 취하기까지 하다니. 어디 그뿐인가, 담배를 피워 보기도 처음이었다. 들이켜 본 담배연기가 매캐해서 눈물 콧물이 다 났지만 그렇다고 모두들 담배 한 대씩 피워 물고 노는 질펀한 자리에서 혼자만 예외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자신을 스스로 깡패들 많은 춘천에서, 당수 1단을 딴 무술 유단자로 포장해 놓았으니, 시골 아이들이 다 하는 술 담배 따위에 쩔쩔 매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터.

술자리가 파할 즈음에 그는 몸을 가누기 힘들게 만취했다. 전 날 산에서 만난 아이의 부축을 받으며 외갓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었다. 물론 아이들에게 변명하기를 잊지 않았다.

아 씨발, 몇 달 만에 술 좀 마셨더니 감당이 안 되네. 씨발.”

춘천이라면 통금 사이렌이 늑대처럼 으허어헝 하고 울었을 늦은 밤인데 충청도 시골에서는 그저 논 개구리들 울음소리만 성할 뿐이었다.

아이고, 이 놈이 꼭 용석이가 방학 때마다 하던 짓을 고대로 하네!”

집 마당까지 부축해 준 아이는 슬그머니 달아났고 그가 혼자 비틀비틀 토단에 올라설 때, 방문 열고 지켜보던 외할머니가 속상해 내뱉은 말씀이다.

용석이란 그의 하나뿐인 외삼촌이다. 서울에서 회사를 다닌다는데, 학창 시절에 방학만 되면 집에 내려와서 외할머니 속깨나 썩혔다던가 했다. 100여 리 떨어진 충주 시내에서 자취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니, 용석이 외삼촌도 고향 마을의 또래들 중에서는 유일한 고등학생이 아니었을까? 춘천에서 온 봉길이 조카처럼 말이다. 그가 희망리 마을 애들의 두목처럼 행세하게 된 것은 춘천에서 당수 1단을 땄다는 위세도 한몫했겠지만 당시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고등학생 신분이었다는 게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시골 애들은 집에서 일꾼처럼 지내는 자신과 다르게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 신분의 또래를 선망했다. 드러내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이래저래 그는 그 날 밤 사건의 주인공으로 유도될 수밖에 없었다.

 

새삼 놀라운 사실은 시골 동네 애들이 술 담배에 아주 능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하는 경험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는 사실상 어른 세계에 진입한 애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옆 동네의 여자애와 가끔씩 그 짓을 한다고도 했다. 동네의 담뱃잎건조장이 그런 장소로 쓰인다나. 손으로 하는 수음이 고작인 그로서는, 그 얘기를 듣던 순간 열패감에 기가 죽었다. 그러나 춘천에 있는 양공주 촌에 가면 말이야하며,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사실은 자기도 주워들었던 음담을 질펀하게 늘어놓으며 괜한 허풍을 떨었다. 그러면서 가슴 한 편으로는 영 편치 않은 양심이었다.

시골 애들이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나오는 인물처럼 이중성을 가졌던 게 아닐까도 싶지만, 그건 아니었다.

술 담배 문제만 해도 그렇다. 종일 고된 농사일을 하다가 밤이 되어야 가까스로 쉬는 그 애들한테 딱히 무슨 낙이 있었을까. 동네에서 외진 데로 나가 술 담배로 낙을 삼을 수밖에. 텔레비전도 없고 기껏해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따라 배우는 게 유행의 첨단을 따라가는 거라 여기며 살았을 그 시절 충청북도 음성군 운포면에서야. 하긴, 춘천 같은 도시에서도 텔레비전은 잘 사는 집에나 있는 고가품이었다.

옆 동네의 여자애와 가끔씩 몰래 그 짓을 한다는 애의 경우를 생각해 봐도 그렇다. 어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질서에 용인되지 않을 뿐이지, 딱히 나쁜 짓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강간이나 간통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혹 여자 애가 임신하는 일이 발생하면 얼마 후에는 마을회관에서 결혼식이 치러지고 한 쌍의 농사꾼 부부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담뱃잎건조장 같은 은밀한 곳에서 그 아이가 남몰래그러면서 지내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의 시골 애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이해해 보지만, 솔직히, 평온한 시골 풍경 속의 애들은 뜻밖에도 까부라진 애들이었고 반대로 깡패들도 널려 있는 대단한 도시 춘천에서 내려온 그 자신은 실상은 순박한 고등학생이었을 거라는 기묘한 의구심을 어쩔 수 없다. 수음하는 게 고작인 성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소주니 담배니 모두 그 시골동네에서 처음 경험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춘천 시내의 서쪽 끝에 위치한 고등학교와 봉의산 바로 아래 달동네에 있는 그의 집 사이의 거리가 십 리 가까이 되었다. 십 리 되는 거리를 매일같이 걸어서 등하교를 하느라 경황이 없는데 언제 술 담배를 배우고 유행가까지 배울 텐가.

아무튼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이상한 조합이었다. ‘충청도 시골의 까부라진 애들과 춘천에서 온 순박한 봉길이가 함께 어울리는 1968년 한여름의 조합 말이다.

 

남원주 휴게소간판이 보인다. 그는 차의 속도를 바짝 낮추어 휴게소 내 광장으로 진입했다. 주차돼 있는 차들이 많지 않다. 평일이기도 하지만 재작년, 원주에 사는 처남 집에 가다가 잠깐 들렀을 때에도 주차된 차들이 별로 없었다. 편히 쉬고 갈 만하다.

화장실에 들른 뒤 휴게실 앞 빈 벤치에 앉았다. 춘천에서 여기까지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 시간 남짓해 음성군 운포면에 닿지 않을까?

한창 젊었을 때에 여행길에 나섰다면, 보통 서너 시간은 운전대를 잡고 달리다가 휴게소에서 쉬었다. 이제는 그러기 힘들다. 오줌을 참기도 어렵거니와 몸도 힘들어서 한 시간 정도 운전하면 피로하다. 여기서 10여 분 쉬고 가자. 인근 산의 빛깔도 이미 단풍 빛은 보이지 않는다. 벌써 초겨울로 들어서려는 늦가을이다. 용석이 삼촌도 세상을 떴다. 3년 전이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뜬 지는 20년 가까이 된다.

 

동네 애들과 밤에 강가에서 어울린 날을 계기로 순식간에 친해졌다. 이제는 이틀에 하루 꼴로 밤에 만나 늦도록 어울리는 것이다.

어울리기에는 일정한 룰이 있었다. 우선은, 반드시 저녁밥을 먹고 난 밤 시간에 한했다. ‘AW메들리 참고서를 다섯 페이지 떼고, 당수 수련을 한 시간쯤 하고나면 닭장 청소 같은 소소한 일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그와 달리, 동네 애들은 해만 뜨면 잠시도 쉴 새 없이 집안농사일을 돕다가 해가 진 뒤에야 비로소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자식을 낳으면 초등학교까지만 가르치고 그 후로는 집안농사일을 거들게 하다가 장가나 보내면 된다는 게 당시 농촌 부모들의 생각 같았다.

두 번째 룰은, 모여서 놀 때는 반드시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동네 어르신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달동네도 있고 깡패들도 널려 있는 도시 춘천과 달리 충청북도 음성군 운포면 희망리는 전형적인, 조용한 농촌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이라 그런지 서너 채의 기와집 외에는 초가집들이 대부분인 고즈넉한 풍경으로서 전통적인 유교적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젊은 놈들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서 떠들썩하게 노는 모습을 동네 어르신들에게 절대 보여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그는 단순히 춘천에서 내려온 봉길이가 아니라 남다른 당수 실력까지 갖추고서 춘천에서 내려온 고등학생 봉길이로서, 이틀에 하루 꼴로 밤마다 동네 애들과 무리지어 강가로, 먼 동네로 여기저기 놀러 다니게 된 것이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동네 애들이 시오 리 떨어진 먼 동네까지 원정 다녀오는 일은, 그와 어울리면서부터였다. 전에는 동네에 있는 강가에서 놀다 오는 게 고작이었는데 대단한 봉길이와 어울리게 되자 그 후로는 원정도 다니며 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원정지는 운포면의 면소재지 동네였다. 희망리에서 신작로를 따라 서남 방향으로 시오 리 걸어가면 나타나는 면 소재지 동네. 작은 규모이지만 우체국도 있고 약방이니 철물점이니 줄지어 있어서, 나름대로 시가지였다. 그래서일까, 희망리 애들보다 확실히 눈매 사나운 또래 애들이 어슬렁거리며 텃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희망리 애들은 어쩌다, 닷새에 한 번 면소재지 장거리에서 열리는 장날에 가도 눈을 아래로 깔고 조심스레 다녔단다.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깡패들이 널린 춘천에서, 당수 1단을 따고 온 고등학생 봉길이가 자기들과 함께 있으니!

밤이 되면 봉길이를 앞세워 흙먼지 날리고 자갈들도 많은 신작로를 시오 리나 걸어가 면소재지 동네를 괜히 한 바퀴 돈 뒤,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담배도 사고는 다시 희망리로 귀가하는 것이다. 귀가할 때도 조용하지 않았다. 신작로를 독차지한 듯 무리지어 걸어오면서 소주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유행가도 고래고래 불렀다.

그러다가 한 작은 사건이 있었다. 이 작은 사건이 그날 밤 사건의 도화선이다. 취해서들 희망리로 돌아오다가 나지막한 고개에 다다랐을 때, 한 아이가 그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이다.

봉길아. 우리는 길가 숲에 숨어 있을 테니까, 니가 당수로 한 번, 고개를 넘어오는 놈을 아무나 한 놈 잡아 솜씨 좀 보여주라야.”

그런 부탁이 나올 만했다. 그 날 밤까지 몇 번이나 면소재지 동네를 휘젓다가 왔으나 특별한 사건도 없었던 데다가, 오랜만에 봉길이의 당수 실력을 다시 보고도 싶었다. 모처럼의 부탁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작로 변에 폼 잡고 서서 고개 너머에서 나타날 누군가를 기다렸다. 물론 동네 애들은 근처 숲속에 숨었다. 달빛이 제법 훤하게 살아난 밤이다.

처음 강가에서 신고식을 치르던 날 밤은 달빛 하나 없던 그믐밤이었지만 이 날 밤은 열흘 정도 지나 달빛이 어지간히 살아난 상현달 밤이었다. 팔자걸음으로 고개 너머에서 나타난 사내가, 그가 난데없이 앞길을 가로막으며 멱살을 쥐자 !’ 하며 기겁한 표정이 달빛에 역력하게 드러난 건 그 때문이다.

, 이 새끼야! , 춘천에서 온 봉길이 알아?”

, 아뇨!.”

이런 씨발 놈이!”

사실 말도 안 되는 시비 걸기다. 그는 놀라 와들와들 떠는 사내의 멱살을 풀어주는가 싶다가 순간 오른발로 후려차기를 강행했다. 세찬 발길에 상체를 맞고는 그대로 나갔다떨어지는 사내.

아이구야, 사람 살려라!”

엉금엉금 기다 일어나 소리 지르며 달아났다. 얼마나 다급한지, 신었던 흰 고무신들까지 벗겨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10분 넘게 벤치에 앉아 있었다. 햇빛은 화창하지만 그늘진 곳은 한기가 역력하다. 그는 벤치에서 일어나 차로 갔다.

그 새 뜨겁게 달궈진 차 안의 공기. 다시 조수석 옆 창을 열려고 버튼을 눌렀는데, 이런, 창이 내려오다가 멈췄다.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다시 버튼을 눌러도 별 변화가 없다.

젠장!’

천생, 나중에 춘천 가서 아는 카센터에 맡겨야 할 듯싶다. 이런 잔 고장이 처음은 아니다. 이 차를 구입한 지 10년이 넘었으니. 그는 하는 수 없이 조수석 쪽 창이 반쯤 내려진 채로 주차장을 떠났다. 여기 남원주 휴게소에서 제천까지는 30분 정도 걸릴 듯싶다.

 

고개 너머에서 한 사내를 보기 좋게 후려차기로 해 치운 사건 후로 그는 마치, 몇 십 년 뒤 TV 인기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인공 김두한처럼 되고 말았다. 괜히 사나운 눈매로, 무리의 한가운데에서 무리와 함께 천천히 걸어가는 우두머리 모습이랄까.

희망리 애들과 그는 무리지어 신작로 시오 리를 걸어 면소재지 동네에 일단, 도착한다. 어깨에 힘들 주고서 짧은 시가지를 두어 번 돌고,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구멍가게에 들러 소주와 담배를 산 뒤 다시 희망리를 향해 신작로 길을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다. 물론 모두 소주에 취해 유행가도 부르고 담배도 피우면서 나름대로 향락을 즐긴다.

춘천이었다면 통금에 걸려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을 밤늦은 시간대였다. 하지만 다행히 충청북도에는 통금이 없었다. 정부에서 제주도와 함께 통금이 없는 지역으로 공포한 덕분이었다. 섬나라인 제주도처럼 충청북도도 치안유지가 잘 되는 순박한 사람들의 지역이라고 정부에서 판단한 걸까.

그가 춘천에 있었더라면 늑대처럼 으허허어엉!’ 음산하게 우는 통금 사이렌 소리에 쫓겼을 텐데 그럴 일 없는 충청북도라니, 얼마나 여유로운 밤 시간인가. 그를 우두머리로 한 희망리 애들의 밤 시간 즐기기가 날로 성해진 건 그 때문일 게다.

그러면서 춘천에서 당수 배운 봉길이란 학생이 왔다는 소문이 일대에 확 퍼진 듯싶다. 워낙 좁고 평온한 시골바닥이기에 소문이 도는 건 순식간이다. 그 결과 그에게 업보처럼 위기가 다가왔다.

그가 어언 45년 간 충청북도 외가 쪽 동네와 인연이라도 끊듯이 발길을 끊게 된 직접적 원인으로서 그날 밤 사건이 다가왔다. 면소재지 동네에서 청주의 모 고등학교로 유학 간 녀석이 있는데 방학이라 집에 왔다가 춘천에서 온, 당수 배운 봉길이소문을 듣게 된 게 그날 밤 사건의 시발점이다. 공교롭게도 녀석은 청주 시내에 있는 당수 도장에서 2단을 딴, 제대로 된 당수 유단자였다.

, 춘천에서 당수를 배운 봉길이란 놈이 툭하면 밤에 여기까지 와 설치다가 간다고? 어디 그럼, 내가 한 번 손봐줄까?”

그런 말을 녀석이 면소재지 친구들한테 내뱉더니 다음 날에는 조금 말이 달라졌단다.

이런 기회에 춘천 당수와 청주 당수가 어느 쪽인 더 센지, 대련 한 번 정식으로 붙어보는 게 좋지 않겠어?”

청주 녀석의 두 번째 발언을 그는 분석해 봤다. 녀석도 마음 한 편으로는 불안한 구석이 있다는 게 아닐까? 뒤늦게, ‘춘천이 깡패들 많은 군사도시라는데 거기서 온 봉길이라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만했다. 더구나 부근 신작로 고개에서 춘천에서 온 봉길이한테 봉변을 당했다는 사람의 소문까지 들었을 테니. 녀석이 고심 끝에, 부담스런 막싸움 형태보다 무술인들의 반듯한 대결 형태로 승부 짓는 게 낫겠다며 신중한 도전장을 보낸 셈이다.

 

 

녀석의 대련 제안도전장이 하루 만에 그에게 전해졌다. 문서가 아니라 지인들의 입을 통해 전달된 구두 도전장이다.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희망리 애들의 우두머리로 으스대며 지내느라 재미있는 날들이 순간 허풍 짓으로 들통 날 위기다.

어떡하나?’

달리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동네 애들한테 이제는 그 먼 면소재지 동네에 가지 말고 예전처럼 가까운 강에 가서 놀다 오자고 제안하고 싶었지만 이미 동네 애들은 과연 청주 당수와 춘천 당수가 맞붙으면 어느 쪽이 이길까?’하는 호기심 내지 설렘마저 생겨나, 돌이킬 수 없는 사태였다.

 

동네 애들이 소 먹일 꼴을 마련하고 돼지 똥을 치우고, 논의 피도 뽑고, 담배 밭의 김도 매고 그러는 땡볕의 낮 시간에 그는 외갓집의 윗방에 누워 이런저런 궁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루에 다섯 페이지씩 잘 나가던 ‘AW메들리영어 공부도 중단됐다.

당수 2단 녀석과 며칠 안 돼 맞닥뜨릴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묘안이 나질 않는 것이다. 물론 녀석의 빠른 시일 내 날을 잡아 대련하자는 제안은 일단 얼버무렸다.

그 새끼, 내가 뭐 한가한 줄 알고 빠른 시일 내에? 웃기고 자빠졌네. 언제고 나중에 한 번은 만나겠지. 그 때 한판 붙으면 되는 거지, 안 그래?”

호쾌한 답변을 기대한 동네 아이가 조금은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놓고는 혼자 윗방에 누워 고민하고 있다. 외할머니는 안방을 쓰고 그는 외삼촌이 쓰던 윗방을 쓰고 있다. 윗방에는 외삼촌이 보던 만화책이니 연애소설책이니, 누렇게 빛바랜 책들이 널려 있다.

액션영화의 한 장면처럼 녀석을 찾아가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드리면서 제가 당수 1단이니까 어디 형님한테 대적이 되겠습니까? 하며 위기를 모면할까?’ ‘아니 그건 너무도 비참한 꼴이다. 만일 그랬다가는 나를 믿고 따르던 희망리 애들한테도 업신여김을 당해, 다시는 방학 때 외가로 놀러오지 못하는 딱한 꼴이 될 거다.’ ‘무슨 소리야? 살고 봐야지. 까짓 거, 매 맞아 죽고 나면 누가 알아나 주나? 괜한 외할머니만 고생바가지를 쓰는 거지. 외손주 장례를 치르느라고 말이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까짓 새끼, 칼 하나 품고 갔다가 싸움이 붙으면 그 칼을 휘두르면서 맞서는 거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래, 고작 당수 대련 한 번 하고 나면 그만인 것을 칼까지 갖고 가 난리친다고? 호적에 빨간 줄 갈 일이 있어?’

비좁은 춘천 집의 뒤란과 여기 뒷동산 숲에서 익힌 독학 당수갖고는 청주에서 정식으로 당수 도장을 다니며 2단을 땄다는 녀석한테 도저히, 대적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개학날이나 가까웠다면 어서 춘천 집으로 가서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짐을 싸서 새벽같이 버스 타고 달아났을 텐데, 개학날이 열흘이나 남았으니 그것도 마땅치 않고.

에라 모르겠다. 죽이 되나 밥이 되나 부딪쳐 볼 수밖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긴소매남방을 걸치고는 방에서 나왔다. 외할머니가 돼지 울에 붙어 서서, 팔자 좋게 바닥에 누운 돼지들의 몸을 작대기로 벅벅 긁어주고 있었다. 그래야 돼지 몸에 붙은 벌거지도 떨어지고, 잘 자란다는 얘기를 그는 들은 듯싶다.

돼지 울 앞을 지나 사립문밖으로 나가는 그를 외할머니가 불러 세웠다.

봉길아…… 차려 놓은 점심도 안 먹고 어딜 가는 기야?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더니만.”

밥 먹는 게 뭐 그리 중요해? , 당수 연습하러 가는 것, 옷을 보면 몰라?”

 

차는 조수석 창이 반쯤 열린 채 제천의 외곽도로를 지나고 있다.

그나마 창이 반 내린 정도에서 고장 나길 다행이다. 쌀쌀한 바깥 기운과 화창한 햇빛이 만들어낸 실내의 뜨거운 기운이 뒤섞이면서 적절한 실내 기온을 만드는 것 같다.

남제천 인터체인지에 다다랐다.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 그는 내비게이션을 간간이 보며 국도로 들어섰다. 30분 이내로 음성군 운포면에 도착할 것 같다. 내비게이션 지도에는 운포면 면소재지를 경유해 희망리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루 종일 청주 녀석에 대한 대책에 골몰하다가 맞이한 그 날 밤이다.

45년이나 흘렀는데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사건을 저지른 그날 밤이다. 보름달이 훤하게 떠 있었다. 동네 애들이 어김없이 외갓집 마당에 들어와 그를 불렀다.

, , !”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집에 있어야겠다고 둘러댈까궁리하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어이!’ 응답하며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이틀에 하루 꼴로 애들이 찾아와 , , 부르고, 그러면 어이대답하고 나가는 변함없는 반복이 조건반사 같은 결과를 빚은 게 아닐까? 아니면 될 대로 되겠지하는 체념이었을까?

어쨌든 그는 별나게 보름달까지 환하게 뜬 그날 밤, 동네 애들과 유행가들을 부르며 신작로를 걸어갔다. 그저께 밤에 마시다 남긴 소주 댓병을 찾아, 두어 모금씩 돌아가며 마셨으므로 유행가가 안 나올 수 없다.

사아나이 가슴에도오 눈물으은 이있다아 이이렇게 정을 두우고 떠어나아 가알 바에……

면소재지 동네로 가는 신작로의 중간쯤 왔을 때다. 멀리, 거뭇한 움직임이 있더니 서서히 사람들 무리로 드러났고, 거리가 좁혀지자 무리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면소재지 애들로 보이는 대여섯 명 가운데에 학생모를 쓴, 키가 다른 애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아이가 있었다.

청주에서 온 녀석이구나.’

이런 순간을 예상하며 지낸 때문일까? 뜻밖에 그는 마음이 가라앉듯, 차분해져 스스로 놀랐다.

약속이라도 한 듯 양 쪽이 약 3미터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무심한 풀벌레 울음소리만이 존재하는 침묵을, 그 쪽 무리에서 키 작은 아이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깨뜨렸다.

그래, 춘천에서 왔다는 그 대단한 봉길이가, 여기 있냐?”

그 아이는 청주에서 온 녀석 옆에 서 있다가 앞으로 나선 것이다. 빈정거리는 어조인 게 춘천 당수와 청주 당수의 대련을 이 자리에서 이끌어내려고 시비 거는 역이다.

그래, 난데?”

하면서 그도 아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아이가 헤헤웃음을 흘리며 한층 빈정거리는 어조로 그래, 당수 실력이하는 순간 그는 얼굴 정면을 주먹으로 냅다 갈겼다. 있는 힘을 다한 단 한 번의 가격에 아이는 어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정확히는, 뒤로 서너 걸음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신작로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잠시 후 엉거주춤 간신히 일어난 아이. 한 손으로 코 부분을 막고 섰지만 신작로 바닥으로 무슨 액체가 툭, , 툭 떨어지는 게 아무래도 코피가 터진 듯싶었다. 급히 지혈을 돕느라 면소재지 동네 애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그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그는 기세 높여 씨부렁거렸다.

이런 씨팔 놈의 새끼가 얻따 대고 까불어! 에이 썅, 죽여 버릴까 보다.”

그러면서 아이 쪽으로 나아가려 하자, 희망리 애들이 다행히도그의 양 팔을 붙잡았다.

그만 참아, 봉길아.”

순식간에 벌어진 눈앞의 참사에 놀란 청주 당수 녀석. 못 이기는 체 양팔이 붙잡혀 있는 그를 향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공손하게, 그러나 애써 품위를 잃지 않으려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씨. 반갑습니다. 저는 청주에서 왔거든요.”

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도 양팔을 애들한테서 뗀 뒤 손을 내밀어 악수했는데 정말, 남은 힘 모두를 모아 내민 손이며 악수였다. 방금 전 아이를 가격한 순간 그의 주먹도 심하게 다쳤기 때문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귀가해서 그 손을 살펴봤더니 온통 시커멓게 멍 든 데다가 새끼손가락은 뼈까지 휘어있었다. 만일 청주에서 온 녀석이 맞은 아이의 복수를 하겠다며 그 자리에서 당수 대련을 청했더라면 그는 꼼짝 못하고 자기 제삿날을 만들 뻔했다.

악수한 채로 청주 녀석이 말을 이었다.

저도 당수를 배웠거든요. 2단입니다.”

나도 당수를 배우긴 했는데, , 그깟 당수 백 날 배워 봤자, 구찌로 찌르면 말짱 꽝 아닌가? 아니, 역도산이 당수를 못해서 죽었나? 안 그래, 형씨?”

구찌란 깡패들이 쓰는 은어로 칼을 뜻한다. 몇 년 전, ‘역도산이라는 재일교포 출신의 유명한 프로레슬러가 일본 조무래기 깡패의 칼에 찔려 허무하게 죽은 사건이 있었다. 레슬링 경기 때마다 당수 기술을 사용해 승리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의 허망한 피살은 아니, 역도산이 당수를 못해 죽었나?’하는 음산한 유행어를 낳고 말았다. 내게 칼이 있으니 함부로 덤비지 말라는 위협에 다름 아니다.

청주 당수 녀석은 기겁해서 침묵했다가, 손수건으로 코피를 막느라 경황없는 키 작은 아이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말했다.

야이, 새끼야. 니가 잘못한 거야. 저 분한테 사과해.”

키 작은 아이가 왼손은 코피를 막으며 오른손을 내밀어 그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말없이 고개를 한 번 꾸벅였다. 그는 몹시 아픈 손으로 다시 악수하면서, 그 아이가 코피만 터진 게 아니라 앞니도 몇 대 나갔음을 눈치 챘다. 코뿐만 아니라 입 부분도 온통 피투성이가 돼버렸기 때문에 아이는 입으로 사과의 말도 못하고 고개만 꾸벅인 것이다. 그는 이거, 내가 간단치 않은 사고를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으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일인 것처럼 넘어갈 수도 없었다. 짧은 시간에 정이라도 든 듯 그는 어울리지 않게, 측은히 여기는 따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많이 아파?”

그러자 아이는 손수건을 잠깐 떼고는 입을 다쳐 제대로 되지 않는 발음으로 겨우 답했다.

……찮아.”

주먹 한 방에 망신창이가 되었으나 애써 사나이의 담대한 기개를 잃지 않는, 딱한 아이였다.

그는 이번에는 청주 녀석한테 아픈 자기 손의 고통을 숨기며 다시 악수를 청한 뒤 말했다.

다음에 봅시다. 그 때, 따로 둘이서 소주 한 병 까자고.”

그런 뒤, ‘춘천에서 온 봉길이의 대단한 당수 실력과 그에 따른 호걸스런 마무리에 존경의 염까지 생긴 희망리 시골 애들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씨발 피 봤으니, 오늘 밤 기분도 좆같고. , 그냥 우리 동네로 되돌아가자고.”

 

돌이켜보면 사건을 저지른 그날 밤자기가 얼마나 기민하게 대처했는지, 스스로도 놀랍다.

요즈음 애들이 잘 쓰는 말로 자뻑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예순세 살 평생에서 1968년 여름날 달밤에 충북 음성군 운포면 희망리 신작로에서 벌인 그 사건만큼 온몸의 피를 끓게 만든 사건도 없었다. 차를 몰고 운포면에 다가가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말이다.

이제 그는 다소 어법에 맞지 않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다.

, 그 날 밤 내가 그 위기를 기민하게 잘 대처했을까?’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그 나이는 인생에서 가장 신체기능이 좋은 나이다. 많은 학자들이 인간은 사춘기 때 몸의 기능이 가장 왕성하다고 진술한다. 1968년 여름 밤, 그는 왕성한 자신의 갖가지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마치 한 마리의 팔팔한 수컷늑대처럼.

키 작은 아이가 시비를 걸어왔을 때 채 말도 끝나기 전에 주먹으로 가격한 사실 하나만 봐도 그런 기능의 유감없는 발휘였다. 왜냐면, 그는 본능적으로 이 순간 이 아이를 공격하지 못하면 내가 당한다. 허를 찔러야 내가 이길 수 있다.’ 판단했고 그 판단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만일 키 작은 아이가 시비를 거는 대로 그들의 작전에 휘말렸다면 그는 청주 녀석한테 엄청 맞고 터지는 결과를 낳으면서 1968년 여름은 그에게 인생 최악의 여름으로 남았을 게다.

그가 2단 옆차기 동작을 활용하지 않고 극히 단순한 동작인 정권 치기’, 즉 주먹으로 그 아이의 얼굴을 가격한 것 또한 아주 적절했다. 왜냐면 2단 옆차기는 화려하고 멋진 동작이긴 하지만 반드시 일정 거리가 확보되어야 하고 준비자세도 갖춰야 했다. 따라서 키 작은 아이가 바짝 다가서며 시비를 걸던 순간에는 결코 적합한 대응동작이 못 되었다. 평범하고 단순한 정권 치기야말로 그 순간 절묘한 선택이었다. 아이가 가격을 당하자마자 무참하게 쓰러지던 모습이 그를 입증한다.

싸움이 끝난 자리를 더 잇지 않고 씨발 피 봤으니, 오늘 밤 기분도 좆같고. , 그냥 우리 동네로 되돌아가자고.’ 며 마무리한 것도 잘한 일이었다. 괜히 머뭇대고 시간을 끌어봤자, 하나도 좋을 게 없었다. 청주 당수 녀석이 뒤늦게 친선경기 한다 치고 당수 대련을 한 번 합시다고 제안한다면 간신히 가라앉힌 재앙이 되살아나 지옥이 될 게 뻔했다. 게다가 키 작은 아이가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연실 닦고 있었으니, 잠시라도 그 자리에 더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그의 차는 마침내 운포면 희망리 마을로 가는 도로로 들어섰다. 방금 전 운포면 면소재지 동네 가까이 다다랐지만 외곽도로로 그냥 지나쳐 온 거다.

자갈 많고 먼지 나던 신작로가 아닌 깨끗한 아스팔트길이다. 그런데 다른 차들도 없이 한적한 길이라 그는 차의 속도를 시속 40키로 정도로 낮추었다.

웬 사내의 멱살을 쥐고 , 이 새끼야! , 춘천에서 온 봉길이 알아?’하고는 냅다 발로 후려차기를 했던 고개가…… 없어진 듯싶다. 고백하건대 달빛에 드러난, 놀란 사내의 얼굴은 최소한 30대는 돼 보였다. 나이도 열 살 이상 될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이다.

운이 좋았다. 만일 사내가 면소재지 파출소로 달려가 춘천에서 온 봉길이란 깡패한테 봉변을 당했다고 신고했더라면 어찌 될 뻔했나? 하마터면, 다음 날 저녁쯤 외갓집에 나타난 경찰관에 체포되어 충주나 청주 같은 대도시의 경찰서로 이송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건 사내가 하마터먼 맞아죽을 뻔했는데 운 좋게 살았다!’며 안도의 숨이나 쉬고 만 덕분이 아닐까?

그리고, 코피가 터진 것은 둘째 치고 앞니가 몇 대 나갔을 키 작은 아이.

다행히 그 아이도 사나이끼리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끝까지 애써 담대한 자세를 유지한 게 아니었을까?

운포면 내에는 마땅한 치과도 없었을 테니 하는 수 없이 충주나 청주의 치과를 다니면서 의치를 해 넣느라 고생이 많았을 게다. 요즈음같이 인정 삭막한 시대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키 작은 아이의 담대함이었다. 그 아이한테 지금이라도 고마워해야 한다.

그의 차가 어느 새 희망리 앞에 다다랐다. ‘희망리란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가 동네 어귀에 서 있다. 그 바위가 아니더라도 버스 정류장 역할 하던 도로 변 구멍가게집이 허름하나마 남아 있어서 희망리 어귀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에 동네 통 털어서 하나뿐이던 그 가게가 이제는 널빤지 여러 장으로 전면을 폐쇄해 버린 폐가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바위 옆에 차를 세웠다.

, 그 날 밤 사건의 현장은 언제 지나쳤을까? 험한 신작로 대신 말끔한 아스팔트길로, 차로 5분여 만에 도착하는 바람에 그날 밤 사건의 현장을 휙 지나치고 만 것 같다. 우선은 외갓집부터 가 보고, 다시 돌아갈 때 사건 현장을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 예전의 굽이 많던 신작로를 바로 펴면서 아스팔트길로 만들어 놓아, 과연 그 현장을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동네 안 길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놀랍게도 예전의 즐비했던 집들이 대부분 사라진 풍경이다. 새마을운동으로 철거됐을 그 많던 초가집들은 그렇다 치고 몇 안 되던 기와집마저 빈 터로 남았거나 농촌주택이라는 표준형 단층 건물로 변해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사람이 사는 주택보다 조립식 창고나 비닐하우스가 더 많아 보이는 동네다.

농촌 사람들 대부분 도시로 나가면서 농촌이 황폐화된다는 뉴스 보도를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듯한데, 45년 전 사건 다음 날새벽에 마지막으로 본 정겹던 풍경이 이렇게 황폐화되었을 줄이야.

45년 전 새벽이다. 그는 책가방 짐을 싼 뒤 외할머니를 찾았다. 외할머니는 새벽부터 부엌 바닥에 앉아 옥수수 껍질들을 벗기고 있었다.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하나 남은 외동아들 용석 아재를 충주의 모 고등학교에 유학까지 보낸 정성은 그렇듯 항시 변함이 없었다.

할머니, 나 춘천 가야 해, 차비 좀 줘.”

갑작스레 나타난 외손주에 놀란 외할머니. 주름살 가득한 얼굴로 옥수수 껍질 벗기기도 멈추고, 그냥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개학하자마자 학교에서 시험을 본다는데 그걸 깜빡 잊었어. 어서 집에 가서 공부해야 돼.”

외할머니는 허리를 천천히 펴며 일어나더니 당신의 허리춤에서 비닐로 돌돌 싼 작은 돈뭉치를 꺼냈다.

차비 하고…… 남은 거는 니 에미한테 줘라. 아니 그런데 손이 왜 퉁퉁 부었냐?”

어제 벌에 쏘였어.”

그럼 된장이라도 발라야제.”

괜찮아. 가다 약방 들를게.”

그는 그 길로 외갓집을 나왔다. 먼동이 트는 새벽에 동네 안 길이 아닌, 뒷동산 오솔길로 해서 동네를 떠났다. 외할머니 말고는 아무도 그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전 날 밤 저지른 일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게 전개될 듯싶은 불길한 예감에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그렇듯 춘천으로 새벽같이 달아나는 방법을 택했다. 개학은 아직도 열흘이나 남았다. 뒷동산을 넘을 때 그는 왠지 외갓집에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잠깐 멈춰 서서 외갓집을 비롯한 희망리 온 동네를 돌아보았다.

‘“꼬끼요오!”

닭울음소리들이 여기저기 나며, 굴뚝들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밥 짓는 연기들. 초가집들 사이로 드문드문 기와집이 있는 그 평온한 풍경.

그의 황급한 처지와 비교되던 평온한 풍경이라니…….

그 후 그는 왠지 외갓집에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장장 45년간이나 발길을 끊었다.

이듬해는 고 3이 되면서 대입예비고사 공부를 하느라 바빴고, 그 이듬해에는 학비가 저렴한 사범대학에 들어가 미팅하고 데이트하고 실연도 하고 그러느라 경황이 없었다. 그러면서 외갓집은 추억 혹은 기억 속의 무엇이 되었다.

솔직히 마음만 먹었다면 외갓집에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한테 주먹을 맞고서 앞니들이 다 나간, 망신창이가 된 키 작은 아이가 마음에 걸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뒤늦게 그 날 밤 사건을 문제 삼을 것 같은 두려움이랄까.

그는 낡은 기억을 뒤지듯, 동네 골목을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골목이라면 동네 안을 이리저리 통하는 길을 뜻하는데 동네가 황폐화된 지금 골목이란 표현이 합당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 때 휴대폰이 부으응!’ 울었다. 아내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차에쥐색빛깔지갑있나확인바람

쥐색빛깔지갑이라면 아내가 성당 갈 때마다 지참하는 돈지갑이다. 그걸 차 안 어디에 둔 모양이다.

이런 칠칠치 못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백 날 콩나물 값 몇 푼을 깎으면 뭐해? 돈지갑도 잊고 다니면서……!’ 속으로 발칵 욕하던 그는 돌연 발걸음을 돌렸다. 조금만 골목을 더 걸으면 외갓집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할 수 있지만 그건 지금 중요치 않다. ‘희망리바위 있는 데로 황급히 걷는데, 조수석 창이 고장 나서 반쯤 열어둔 차 생각이 퍼뜩 났기 때문이다. 인적도 그친 동네처럼 보이지만, 모르는 일이다. 누군가 조수석 창 안으로 손을 넣어 차 문을 연 뒤, 돈지갑을 갖고 갈 수 있다.

황급히 뛰어갔더니, 늦가을 햇살 아래 차는 그대로 있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움직임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불편한 차 실내에서 몸을 사방으로 움직여가며 쥐색빛깔 지갑을 찾았다. 없었다. 글러브 박스는 물론이고, 의자 뒤의 주머니 닮은 부분의 속과 의자 밑까지 샅샅이 살폈으나 그 지갑을 찾을 수 없었다.

모자란 여편네 같으니라고. 대체 어디다 흘린 거야.’

마지막으로 트렁크를 뒤져볼 생각에 차 밖으로 나왔는데 그 때 조수석 쪽의 창유리가 푸르륵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졌다. 반 정도 열려 있던 게 이제는 활짝 열린 꼴이다. 장만한 지 10년 넘었음을 어김없이 증명하는 고물차다.

이제 어떻게 한다? 이대로 400리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그랬다가는 꼴불견도 그렇지만, 차 안으로 들이치는 쌀쌀한 바람을 세 시간이나 감당해야 한다. 그건 못할 짓이다. 천생, 카센터라도 찾아, 어서 해결하자. 그러려면 면소재지로 가 볼 수밖에.’

그는 아까 오던 아스팔트길로 부지런히 차를 몰았다. 45년 전 그날 밤 사건의 현장이고 뭐고 차창 고장을 수리하는 일이 급하다.

면소재지 동네에 도착했다. 희망리와는 다르게 제법 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선 장거리. 약국, 다방, 당구장, 철물점, 농협 하나로마트, 우체국…… 인적은 뜸하지만 있어야 할 건물들이 작은 규모로 존재하고 있다. 마침내 우정 카센터란 간판의 조립식 건물을 만났다.

차를 건물 앞에 세우자 키 작은, 때에 전 가죽점퍼 차림의 사내가 안쪽의 작은 사무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나 참! 조수석 창유리가 내려가서는 안 올라오거든요.”

고치는 데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오늘 중으로야 수리되겠죠?”

그 말에 사내가 입을 벌리고 헤헤 웃는데 앞니 모두가 누런 금니였다. 작은 키에 앞니를 다 간 사내……. 그는 억지로 따라 웃으며 등허리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 때 성가시게도 휴대폰이 또 부응울었다. 아내가 다시 보낸 문자메시지.

찬미예수님지갑주방에서찾았어미안해당신지금어딨어?’

이럴 때 답신이 가능할까?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다는 이상한 답신이 아내에게 가능할까? 그도 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