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 동안 별 일 없었니? 으응 별 일 없었다고? 나는 별 일이…… 있었는데. 그 별 일을 얘기해 줄까?

이 얘기는 너한테만 하는 거다. 그러니까 다른 애들한테 절대 말하지 마. 절대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치고 세상에 널리 퍼지지 않는 게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믿어. 너는 내 유일한 절친이잖아. 그러니까…… 어제 새벽, 아니 오늘 새벽의 일이네. 이렇게 새벽까지 장사하다가 귀가하는 생맥주집 마담 생활이 칠 년이나 됐으면서도 그 날 새벽이 전 날 새벽처럼 여겨지는 착각은 뭔지, 나도 참.

그래그래, 오늘 새벽에 있었던 별 일을 얘기해 줄께. 그럼 어제 밤부터 소급해서 얘기해야겠네. 어제 밤 열한 시는 넘어서 그 자식이 어디서 일차로 술 한 잔을 걸치고 우리 가게에 왔거든. 건축업을 한다는 자식인데 아직 이름은 몰라. 열흘에 한 번 꼴로 우리 가게에 와서 혼자 소주 한 병 노가리 한 접시를 시켜놓고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다른 손님들이 없으면 내게 수작을 걸지. “저 여기, 술 한 잔 받지 않겠수?”하고 합석을 청하고는 쓴 소주 한 잔 건네며 쓸데없는 얘기들을 늘어놓는 거지. , 자기 젊었을 적에 특수부대에서 명사수로 활약했다는 얘기인데…… 내 보기에는 몸도 작고 약해 보이는 게 아무래도 동사무소 방위로 때운 자식 같아.

나야 손님들 접대하는 장사니까 어떤 손님이 내 마음에 든다 안 든다 할 처지가 아니잖아? 그래서, 그 자식이 뭐라 하든 고개를 끄덕이면서 얘기를 들어주다가 다른 손님이 들어오거나, 씨디 판이 다 돌아가서 음악이 끊기면 그것을 핑계로 자리를 뜨는 거지.

그런 핑계 말고도 갑자기 어디서 전화 온 듯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어 여보세요, 아 네네…….”하면서 급하게 통화할 모양으로 그 자리를 뜨기도 하지. 그냥 더 앉아서 안주라도 추가 주문하도록 부추길 수 있지만 그 자식한테는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니까. 얼굴도 못생긴데다가 매너도 꽝인 거야. 솔직히 바쁜 사람을 불러다 앉혔으면 마시고 싶은 술이나 안주라도 있어요? 내가 낼 테니까 말입니다.”하는 정도의 매너를 보여야 하는 게 아니겠니? 그런 매너 한 번 보이는 일 없이, 자기가 마시는 쓴 소주나 한 잔 건네며 말동무 하자는 그런 작자한테 내가 호감을 가질 일은 없잖아.

그런데 어제 밤은 이 자식이 이상하더라고. 거나하게 취해서 다 늦은 시간에 우리 가게로 들어온 것도 그렇지만 나를 불러서는 웬 일로 나는 소주면 되지만 댁은 무슨 술을 좋아하슈?”하고 묻더라니까? 전에 없는 매너라 미심쩍긴 했지만 모처럼의 매너를 물리칠 필요는 없잖니? 그래서 저는 복분자주를 좋아하는데요.” 해 버렸지. 그 술이 우리 가게에서 제일 비싼 술이잖니. 내가 좋아하는 술이지. 그랬더니 그 자식이 그럼, 댁도 그거 한 병 드슈.”하는 거야. 그래서 그 자식의 애호 메뉴인 소주, 노가리와 복분자주를 준비해 갖고서 그 자식의 맞은편 자리에 합석해 마시기 시작했거든.

2차로 들른 게 분명한데다가 내게 비싼 술도 내는 것으로 봐서, 나는 속으로 이 양반이 오늘 낮에 무슨 좋은 일이 있었구나.’ 생각했지. 달리 그 늑대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까. 다른 날보다 손님도 별로 들지 않고 해서 그 자식의 특등사수 얘기를 다시 들어주면서 복분자주를 한 병 다 마시고는, 눈치를 보았잖니? 그랬더니 그 자식이 한 병 더 마시지 그래? 소주도 한 병 더 갖고 오고 말이야.” 하더라고. 매상도 적은 날이니 이렇게 해서라도 보충해야겠다는 욕심이 들대. 그래서 고맙습니다, 사장님.” 하면서 추가로 복분자주와 소주를 갖다 놓고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니까.

그러다가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었어. 다른 테이블에서 생맥주잔들을 부비며 뭐라 열심히 속삭이던 남녀도 가 버리고, 나와 그 자식만 가게에 남게 됐지. 다른 날이면 손님이 한 팀 정도는 들어오기도 하는 시간대인데 전혀 그런 기미도 없는 거야. 그래서 슬슬 겁이 나더라니까. 그 자식이 소주를 세 병째 주문하면서 복분자주 한 병 더 하겠수?”하고 내 의사를 물었을 때 사양하고 일어날 수밖에. 아무래도 그 자식 하는 수작이, 내가 더 합석하고 있으면 안 되겠더라고.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어. 내 자리, 주방 자리야 항상 일거리가 있지 않니? 안주거리를 점검해야지, 가스기기 주변을 소제해 놓아야지, 술잔들을 물통에 담가서 하나하나 씻어 놓아야지…… 장사 준비할 게 늘 있잖니?

그러면서 그 자식의 눈치를 보는데 그 자식이 빈 술병들을 늘어놓은 채로 뭘 궁리하는 표정 같더라니까. 마음 같아서는 문 닫을 시간이니까 계산 부탁 합니다.’ 말하고 싶지만 그래도 세 시간 가까이 합석했는데 매정하게 그러기는 좀 뭣했지. 그래서 저 자식이 저러다가 졸리면 알아서 일어서겠지 하는 기대심으로 설거지를 하면서 기다렸지. 그러다가 두 시를 넘어서 세 시가 돼가는 거야. 내가 보통 가게 문을 닫고 귀가하는 시간인 거지.

그런데 그 자식이 게슴츠레해진 눈길을 내 쪽으로 던지며 죽치고 앉아 있는 게, 아무래도 내가 문 닫고 갈 때 따라붙으려는 속셈 같더라고. 내가 이런 일을 한두 번 당해 본 줄 아니? 안 되겠더라고, 마침내 내가 한 마디 했지. “사장님, 지금 문 닫고 갈 건데요.”

그랬더니 그 자식이 뭐라고 한 줄 아니? 이러더라고. “여기 복분자주 한 병 하고…… 제일 비싼 안주 하나 더!”라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아니에요, 저는 술 됐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세요.” 했지. 그랬더니 이러더라니까. “내가 복분자주를 마시려는데 무슨 소리야?”

그래서 내가 아예 음악까지 끄고 나서 말했어. “복분자주 다 떨어졌어요. 이제 문 닫고 나갈 겁니다.” 했지. 음악도 끄니까 숨소리까지 들리는 판이 되었는데 그 자식이 부스럭거리며 지갑을 품에서 꺼내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여봐, 목욕 값 넉넉히 줄 테니까 나하고 같이 나가면 안 되나?”하는 거지. 그렇게 그 놈의 새끼가 늑대본성을 드러내더라니까. 대꾸도 않고 가게 안의 전등들을 안쪽에서부터 끄기 시작했는데 그 자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오더라고. 기겁해서 그 자식을 피해서 후다닥 문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지. 112로 전화해서 경찰차를 부를 수도 있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이냐? 조용한 새벽시간에 요란 벅적한 경찰차가 오는 것도 그렇고…… 경찰차가 들락거리기 시작하면 그 가게는 오래가지 못하거든.

밖으로 피하긴 했지만 가게 문을 닫지 못했으니 멀리 갈 수도 없고…… 그러니 우리 가게가 보이는 골목구석에 숨었는데 그 자식이 비틀거리며 나를 잡겠다고 가까운 골목언저리부터 뒤지는 거야. 그 자식이 우리 가게 오기 전부터 단단히 무슨 결심을 하고 온 게 분명했어. 모르긴 해도 우리 남편에 대한 조사까지 마치고는 남편이 산재병원에 십 년째 있는 여자라니, 까짓 거 생과부나 다름없구먼.’ 하는 판단을 내린 모양이야. 내가 서러울 때가 이런 때지.

그 자식이 긴 골목의 구석구석, 전봇대 뒤라든가 슈퍼마켓 집 바깥의 하드상자 뒤편 같은 데를 하나하나 뒤지면서 오더라고. 하는 수 없이 숨었던 남의 집 대문 앞 후미진 데를 떠나서 골목을 한 바퀴 돌았는데…… 어쩜 좋니? 그 자식이 골목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내 뒤를 쫓는 거야. 가게 문도 못 채웠으니 골목을 벗어날 수도 없고 시간은 새벽 네 시로 되어가고…… 늦어도 그 시간에는 들어가야 우리 집 애들 아침상이라도 차려놓고 늦은 잠을 한잠 잘 수 있잖니? 애들이 다 컸어도 아직도 내가 아침상을 차려놓아야 밥 먹고 학교들 간다니까.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한데…… 웬일이야, 그분이 큰길가에 서 있더라고! 그분이 누구냐고? 내가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 줄게. 아주 점잖은 분이란 것만 우선 말할게.

그분한테 체면 불구하고 다가갔지. 컴컴한 골목에서 내가 나타나니까 그분이 펄쩍 놀라더라고. 슬리퍼를 신고 있다가 그만 한 쪽을 발에서 놓치더라니까.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어. “선생님, 저 아시죠?” 그랬더니 그분은 큰길의 가로등 빛을 이용해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그래서 부탁했지. “지금 나쁜 자식이 저를 어떻게 하려고 쫓아오거든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남편인 것처럼 제 옆에만 서 주세요.”

그러니까 그분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자식이 그 때 다가왔어. 느닷없이 내 옆에 어떤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자식도 놀라, 대여섯 걸음 거리를 두고 멈춰 서더라고. 내가 말했어. “내가 늦으니까 우리 남편이 걱정돼 여기까지 왔어요. 그러니까 사장님이 나를 바래다주지 않아도 됩니다. 계산이나 하고 가세요. 오만 육천 원입니다.”

그 자식이 지갑을 꺼내더니 기가 꺾인 소리로 묻더라고. “여기서 돈 드리나?”

나는 가까이도 가기 싫어서 그냥 문 안에 놓고 가세요.” 했지. 키도 작은 자식이 기가 꺾이니까 더 작아 보이더구나. 그런 꼴로 그 자식이 사라진 뒤 나는 그분을 모시고 가게로 다시 들어갔지. 그 자식이 문 안 바닥에 놓고 간 돈을 세어 보니까 오만원이더라고. 육천 원을 덜 낸 거야. 정말 나쁜 자식이지.

그분한테 앉으시라고 해 놓고 생맥주 한 잔을 만들어 드리려 했더니 이러시는 거야. “아니 마담, 새벽부터 무슨 술은?” 웃으면서 하는 말씀에 나는 당황해서 그럼 뭘 드릴까요?”했더니 그냥 냉수나 한 컵 주쇼.”하는 거였지. 그래서 냉수 한 컵을 갖다 드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왜 그리 쏟아지던지, 나도 모르게 잠시 흐느꼈단다. 얼마나 서러운 내 팔자냐 말이다.

그분이 내가 눈물을 훔치고 나니까 말씀하더라고. “늙어서 새벽잠이 짧아지는지라 오늘도 꼭두새벽에 깨어나는 바람에 다시 잘 수도 없고 해서 옷을 입고 집을 나와 마냥 걷다보니까 이 동네까지 온 거라고. 그러면서 어찌 됐건 자기가 곤경에 처한 마담한테 도움을 주었다면 기쁜 일이라 덧붙였지.

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말씀을 길게 드릴 수도 없고 해서 선생님, 오늘 저녁에 한 번 들러주세요. 제가 아까 신세진 것을 갚고 싶거든요.”했지. 그랬더니 그분은 , 나는 그냥 마담 옆에 서 있었을 뿐인데 무슨 신세는…….”하면서 나가시더라고.

정말 좋은 분이지?

아무래도 어디 대학교 교수가 아닌가 싶어. 나이는 우리보다 서너 살쯤 위가 아닐까? 가끔씩 우리 가게에 들러서 말없이 생맥주 한 잔을 들으면서 음악을 듣다가 가곤 하시지. 생김새는 그냥 순하게 생겼어. 글쎄, 교수로써 좀 늙은 분 얼굴을 생각하면 될 거야. 그런데 말이야, 내가 그 자식 이야기 하느라고 정작 그분 이야기를 조금밖에 못했는데…… 이상하게 내 가슴이 뛴다니까? 그분 이야기를 처음 하는 것인데도 말이야. 새벽에 내 옆에 남편인 척 서 계실 때에는 내 옆구리가 따듯하고……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 있지?

나도 미쳤나 봐, 멀쩡한 남편을 두고 이런 말을 하니 말이다. 뭐라고? 내가 연애한다 해도 뭐라 나무랄 사람 하나 없을 거란 말이지? 얘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나는 그냥 솔직한 심정을 너한테만 말하고 싶었던 거야.

얘도 참…… 내가 다시 전화할 게. 오늘 저녁 때 그분이 오면 어떤 분인지 여쭈어 보고 다시 너한테 전화할게. 그럼 이만 끊어. 그래그래, 지금 오후 네 시이니까 부지런히 화장하고 가게 나갈 채비를 해야지. 그럼…….

 

별 일 없었니? 내가 날마다 전화하는 셈이네? 그럼, 그분 얘기를 하고 싶어서 전화 걸었어. , 궁금하지 않았다고? 시끄러워, 년아! 하하하하.

자 그럼, 얘기 들어. 너는 힘들 것 없어. 어제처럼 그냥 듣기만 하면 돼.

내가 …… 다른 날들보다 한 시간은 이르게 가게 문을 열고서 기다리는데 그분이 오지를 않더라고. 그런데 앞마당 비로 쓸자 문둥이가 온다고…… 그 망할 자식이 일찍이도 들어와서 소주 한 잔을 시켜놓고 앉아 있으니 얼마나 내 마음이 편치 않던지! 눈치를 보니까 그 자식이 뒤늦게 정말 그 여자, 남편이었나?’ 수상하단 생각에 확인 차 온 모양이야. 자기가 알기에는 분명 남편이 산재병원에 십 년째 누워 있다는데 그렇게 꼭두새벽에 남편이란 사람이 멀쩡하게 와 있다니, 아무래도 미심쩍다는 생각이 든 게지.

덜 낸 돈 육천 원부터 달라고 싶어도 일단 참고서, 그 자식이 주문한 소주와 노가리를 준비해 갖다 주고 주방에 있었지. 그러다가 시간이 웬만큼 지나서 손님들이 들어올 때부터는 주방을 나가 주문도 받고 합석도 해 주고 하면서…… 그 자식 있는 구석 쪽으로 가는 일은 피했지. 벌레 같은 자식이라 내쫓고 싶지만 여기가 서비스업이니까 어떡하니? 그냥 냅둬야지.

그런데 그분은 오시지 않는 거야. 그 자식은 소주 한 병 갖고 두 시간 넘게 미적거리면서 나를 살펴보는데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친정의 오라비라도 불러서 그 자식을 해결하고 싶은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이냐? 친정에 근심거리 하나 덧붙이는 일밖에 더 되겠니? 문둥이 같은 자식은 오늘도 자정 넘어서까지 남아서 무언가 짓거리를 할 눈치이고…… 그래서 고민하면서 장사를 하는데 그분이 나타났단다!

얼마나 반가운지 냉동 오징어들을 가스 불에 녹이다가 그만 태울 뻔했단다, . 그러니까 밤 아홉 시가 될 즈음에 그분이 물방울무늬 티셔츠 차림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거, 있지. 나는 얼른 주방을 나가서, 창가 테이블의 의자를 잡아 조금 뒤로 빼주어 그분이 편히 앉도록 한 뒤에 말을 건넸지. “선생님, 뭐 좋아하세요?” 물었더니 늘 하던 대로 생맥주 오백하고 마른안주 줘요.”하는 거야. 내가 더 비싼 것을 시키셔도 됩니다. 제가 내는 거니까요.” 했더니 허허 웃으면서 그럼, 마담이 좋아하는 복분자주 한 병을 추가합니다.” 하더라니까. 그분이 내가 좋아하는 술도 알고 계신 거야.

나는 가슴이 콩닥거리면서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더라니까. 아마 실내 불빛이 밝았다면 그런 내 얼굴빛이 보였을 텐데 어둡기 다행이었지. 뭐라고?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얘는…… 내가 팔자가 꼬여서 이리 됐지만 이래봬도 여고 시절에는 문예반을 했었잖니?

맞다, 맞아. 그분은 국문학과 교수일 거야. 점잖은데다가 희끗희끗한 머리, 생각 깊어 보이는 얼굴…… 틀림없어, 내가 이 장사 칠 년 동안 통달한 것 중 하나가 손님들 직업 맞추기라니까.

나는 주방에서 마른안주와 술을 준비해서 그분 자리에 가서 합석했단다. 구석에 앉은 그 개자식이 연실 가자미 눈깔이 되어서 그분과 나를 째려보더구먼.

얘도, 고만 웃어라 얘.

그분이 복분자주 병마개를 따더니 내게 한 잔 따라주어서 나는 그분의 맥주잔과 보조를 맞추면서 마셨지. 다른 손님들의 추가 주문을 받거나 나가는 손님들의 계산을 받을 때 이외에는 그분 자리에 합석해서 술잔을 나누었단다. 어쩜 그분은 음악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은지! ‘호텔 캘리포니아가 나오니까 이건 몽롱한 대마초를 피우는 그런 세기말적 분위기의 노래인데하면서 그에 얽힌 뒷얘기라든가, ‘디 엔 오브 더 월드가 나오니까 마담, 이 노래 부르는 스키드 데이비스가 지금 할머니가 되었다는 것 아시나?”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적이 있다는 등…… 웬만한 라디오의 음악전문 디제이 못지않으시더라고.

처음으로 합석해 본 셈인데 얼마나 구수하고 박식하게 말씀을 잘 하시는지!

사실, 내가 특정 손님과 오래 합석하는 것은 그리 좋은 게 아니거든. 다른 손님들한테 소홀히 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고…… 다른 생맥주집에 갈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내가 보고 싶어서 들른다는 손님들이 삐쳐서 다른 데로 갈 수도 있거든.

얘는, 뭔 소리니? 난 아직도 예쁘다는 말을 듣잖니? 우리 가게가 외진 데 있어도 손님들이 찾아오시는 이유를 너는 모르니? 내가 오십 나이인데도 다들 사십대 초 중반으로 보고 있다니까. 물론 화장발 덕을 단단히 보긴 하지만 말이다. 하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그분이 말씀도 잘하시지만 얼굴도 동안이더라고. 나는 그분이 그 새벽에 늙어서 새벽잠이 짧아진다.’는 얘기를 할 때에는 이분이 무슨 소리를 하나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정년퇴직한 분이더라고. 공직생활을 하다가 막 퇴직하셨다는 거야. 그러니까 환갑이 다 된 분이지. 그런데도 어쩜 오십대 중반이나, 우리 또래처럼 보이냐? 가까이서 뵈니까 얼굴에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게 전혀 환갑 나이가 아닌 거야. 이런 분이 우리 가게를 전부터 간간이 들렀는데도 내가 어떻게 제대로 알아 뵙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까 싶더라니까.

그분이 나는 생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게 취미인데 이렇게 예쁜 마담도 알게 되었으니 이 집의 단골이 되겠다.”고 하시는 것 있지? 그러니 앞으로는 자주 들를 거야. 그래그래, 그분이 들를 때 곧바로 너한테 전화할 게. 그 때 와 봐. 그분이 어떻게 생긴 분인지 너한테 보여주고 싶구나.

내가 그분한테 혹시 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있다가 퇴직하지 않으셨어요?”하고 물었더니 허허 웃으면서 그건 아닙니다. 거기는 환갑이 넘어 예순다섯이 정년이거든요. 나는…… 가만 있자, 이 문제는 퀴즈로 두겠소. 마담이 내가 뭐하다 나온 사람인지 맞추면 상으로 점심 한 번 내리라.”하는 거였지. 어쩜 목소리도 그윽하고 잔잔한지.

그러고 있으니까 그 개자식이 영 수상하다는 눈길로 우리 쪽을 째려보며 앉아 있더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무래도 부부로 보이지 않았겠지. 어디 부부가 그렇게 매너를 갖추고 마주앉아서 술잔을 나누니? 그러니까 그 자식이 저건 아무래도 수상하다. 부부는 아니다. 그럼 무슨 관계일까?’ 생각했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든든한 백 하나가 생긴 셈이므로 그 자식을 눈앞에서 내쫓아야겠다는 마음까지 들더라니까. 그깟 자식 하나 안 온다고 매상이 줄면 얼마나 줄겠냐? 그래서 그분께 생맥주 한 잔을 추가로 갖다드리려고 일어난 김에 그 자식한테 가서 말했지. “어제 육천 원을, 마저 주셔야죠.”

그랬더니 그 자식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거, 있지? 내가 그깟 자식이 겁날 게 뭐가 있니, 든든한 그분도 가까이 앉아 있는데…… 그분이 덩치도 좋아서 작은 그 자식 덩치의 두 배는 돼 보이거든.

그 자식이 이러더라고. “이따 나갈 때 주면 안 되나?” 그래서 지금 주세요.” 했더니 그 자식이 나 참!” 하며 일어나면서 어제 남긴 돈 육천 원과 오늘 계산 만 이천 원을 합쳐서 만 팔천 원을 테이블 위에 팽개치듯 탁 놓고서 문 밖으로 나가 버렸어. 꼬리를 밑으로 감은 똥개 모양, 꺼지던 꼴이라니! 하하하하.

그분과 나는 자정 가까이 술잔을 나누었단다. 나는 복분자주를 두 병이나 마셔서 좀 취했는데 그분은 기껏 생맥주 오백을 세 잔 마셨는데도 취하신 것 같더라고. 내가 더 드시겠어요?” 물었더니 아니, 됐어요. 나는 많이 못합니다. 이만 가야죠.” 하시는 거야. 그러면서 어쩐 줄 아니? 글쎄, 지갑을 꺼내 계산하시려는 거야. 내가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내는 겁니다.” 해도 다음에 마담이 내세요.” 하면서 굳이 만 원 짜리 네 장을 주시는 거 있지. 나는 하는 수없이 오천 원을 거슬러서 그분한테 드렸어. 복분자주까지 삼만 오천 원이 나왔거든. 그런데 그분은 됐습니다.” 하면서 잔돈도 받지 않으시니…… 얼마나 넉넉하고 좋은 분이니!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아마 내가 취해서 힘든 내 팔자 사연을 털어놓았나 봐. 그분이 그런 나한테 술값 부담은커녕 몇 푼이라도 남겨주고 싶었던 게 아니겠어? 얼마나 마음씨 좋은 분이니!

나는 그분이 문 밖으로 나갈 때 뒤따라 나가서 배웅까지 했단다. 그분은 내가 따라 나왔는지도 모르고 그냥 걸어가다가 선생님 또 오세요.”하는 내 인사말을 뒤로 듣고는 놀라서 뒤돌아보더라고. 그럴 때는 어쩜 청소년 같던지.

잠깐, 밖에 누가 왔나 보네. 뭐요? …… 아파트 노인회? 아예, 폐휴지 받으러 오셨구나. 잠깐만요. 얘야. 오늘 전화는 여기까지 할게. 그럼 끊어.

 

별 일 없었니?

먼저 통화하고 열흘만이지? 바쁜 일들이 있어서 너한테 전화 한 번 못하고 지냈네. 남편 있는 산재병원도 다녀오고 서류도 떼어다 주고 그러느라 좀 바빴어.

그분 얘기부터 시작할 게. 그분이 자기가 뭐하다가 퇴직했는지 퀴즈로 낸다 했잖아? 알아냈어. 그분은 바로 일 년 전에 여기서 가까운 시골의 군청에서 과장으로 있다가 퇴직한 분이시더라고. 문화관광과라고 갖가지 문화행사를 주관하는 부서의 장이셨다는구나. 그분이 내게 말해 준 것은 아니고 우연히 다른 손님한테서 얘기 들었지.

그러니까 지난 주 일요일이었어. 그날 초저녁부터, 등산 다녀온 분들이 한꺼번에 여남은 명 들어찼는데 그분이 공교롭게 그 직후에 나타난 게 아니겠니? 일주일 만이었지. 그분은 잠깐 들어왔다가는 실내가 떠들썩하니까 그냥 휭 나가시더라고. 나는 얼마나 속상하던지 쫓아나가서 선생님, 이따가 다시 들르세요.”하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고개를 그냥 끄덕끄덕 하며 가시는 게 다시 들를 것 같지 않더라니까. 얼마나 속상하니, 하필 기다리던 그분이 오기 직전에 무더기로 손님들이 닥칠 게 뭐니? 매상도 좋지만 이럴 때는 속상하단다.

맞아 맞아, 그 날이야. 내가 일손 좀 도와 달라고 너한테 전화 건 그 날이야. 네가 남편이랑 속초에서 광어회를 먹고 오는 중이라 했지. 그래서 하는 수없이 이웃 식당 집 아주머니 일손을 빌려서 손님들 접대를 치렀다니까. 아주머니한테 돈 만원을 나중에 드렸지 뭐. 그런데 그 손님들 중 한 분이 내게 이러시는 거야. “아까 들어왔다 그냥 나가신 분, 여기 잘 오세요?” 그래서 내가 네에, 우리 집 단골입니다.”했더니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야. “그분이 ○○군청에서 문화관광과 과장님으로 퇴직한 분이지요. 내가 십여 년 전에 상사로 모시기도 했는데 오늘 얼결에 인사도 못 드렸네. 그분이 글 쓰는 게 취미라 수필집도 한 번 냈어요.”

나는 그 말씀에 얼마나 가슴이 벅찬 줄 몰라. 내가 그분 정체에 대해 반은 맞춘 게 아니겠니? 국문과 교수는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수필집을 낸 분이라니…… 대학 교수와 뭐가 다르겠니? 내가 누구니? 여고 시절에 글짓기 백일장만 나가면 상을 타던 애가 내가 아니었니? 여류작가가 되는 게 그 때 내 꿈이었다고.

어쩜, 글 잘 쓰는 분을 이렇게 만날 줄이야!

역시 뭔가 다른 분이었어. 내가 왜 진작부터 그런 괜찮은 분이 우리 가게를 들르는데도 모르고 있었지?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까 그럴 이유가 있었어. 다른 손님들과는 합석하면서 신상을 알게 되는데 그분과는 합석이 그 날 처음이었거든. 합석이란 게, 내가 청하는 게 아니라 손님들이 청해야 가능한 일이잖아. 그러니 항상 혼자 말없이 맥주를 마시다가 가는 그분이…… 어려워서 어디 내가 말이나 붙일 수 있었겠니?

그런데 그 날 새벽 이후로 그분과 합석하게 되면서…… 알면 알수록 아주 괜찮은 분인 거야. 무뚝뚝해 보이지만 마음속도 따듯하고, 역시 글 쓰는 분이니까 뭐가 달라도 달랐어. 우리 여자들이 사내들은 다 똑같이 도둑놈들이라고 말하지만……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분은 달라. 정말 점잖고 좋고 괜찮은 분이야. ? 잠깐 기다리라고? 알았어, 년아.

그래…… 무슨 일이야? 강아지가 거실바닥에 오줌을? 니미, 개 팔자도 좋네. 삼십 평 넘는 아파트에 사람과 같이 살면서 아무 데다 오줌 싸고 먹고 자고…… 나보다 낫네. 정말 개 팔자 상팔자네.

, 그분 이야기를 마저 할게. 시끄러워! 너는 그냥 듣기만 해. 내가 수다 떠는 일 외에 무슨 낙이 있니, 년아. 하하하하.

그분 이야기나 조금 더 하고 오늘 전화 끊을 게.

그분이 그렇게 단체 손님들로 떠들썩하니까 휭 하니 가시고 난 그 이튿날 초저녁에 다시 우리 가게에 오셨다는 게 아니니? 내가 안의 전등들을 켠 뒤 바깥의 간판 불을 켜는데 그분이 들어오셨다니까. 항상 당신이 즐겨 앉는 창가 테이블 자리에 앉더니 마담, 음악 틀어줘요. 그리고 생맥주 오백하고 마른안주…… 그리고 복분자주도 한 병.” 하시는 게 아니겠니?

그래서 그분이랑 호젓하게 마주앉아 술잔을 나누었다는 게 아니니?

우리 가게가 외진 데 있어서 초저녁에는 손님들이 거의 없거든. 대개 시내에서 일차로 술 한 잔 마시고 귀갓길에 들르는 늦은 손님들이 많지. 그러니까, 잔잔한 팝송 씨디를 골라서 틀어놓고 나는 그분과 호젓하게 마주앉아 술잔을 나누었단다. 네가 알지만 나는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시집갔잖아? 이 장사를 한 뒤로 남자들이 단골손님이랍시고 접근들 많이 했지만 다 그게 그거야. 빤한 늑대속셈이 아니겠니? 자기 마누라 아닌 다른 여자 맛 좀 보자는 게 아니겠니? 내가 손님 자리에 합석을 잘하긴 해도 항상 조심한다니까. 이 좁은 바닥에 외간남자와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하니? 손님들 떨어져 나가는 게 문제 아니지, 머지않아 시집 장가보낼 내 새끼들 앞날까지 먹칠할 일이지.

가만 있자, 그분 얘기를 한다는 게 심각한 얘기로 들어섰네. 그 날 그분 얘기로 다시 돌아갈게.

내가 그분한테 말씀 드렸지. “이렇게 초저녁에 들르시면 대개 손님들도 없고 조용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시간대에 자주 와 주세요.” 그러니까 그분이 이러시더라고. “내가 겉보기보다는 몸이 안 좋아요. 환갑 다 된 노인네니까 당뇨니 고혈압이니 해서 몸이 시원치 않아서…… 그래서 이 집을 자주 오고 싶어도 그러지를 못 하는 거요. 의사가 술은 절대 금하라지만 노후에 술도 못하면 무슨 낙으로 사나? 그래서 도수가 약한 생맥주를 마시는 거지.”

자주 오실 것 같았는데도 그러지 않은 이유를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어. 나는 그분께 그 퀴즈 얘기를 꺼냈단다. “선생님, 먼젓번에 내신 퀴즈의 정답을 제가 알 것 같거든요? 맞추면 점심 한 번 사신다 했지요?”하니까 그분이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선생님은 ○○군청 문화관광과 과장님을 하시다가 나온 분이잖아요? 수필가이시고. 맞죠?” 하니까 그분이 껄껄 웃으면서 하여튼 이 도시가 좁아. 금세 알아냈네! ……그래, 마담한테 점심 한 번 내야지. 그럼 말이야, 마담 휴대폰 번호 좀 가르쳐 줘요. 내가 적당한 날 낮에 연락할 테니까.” 하시더라고. 그래서 내 번호를 가르쳐 드리고 제가 오전 중에는 잠을 자고 낮 열두 시경에 일어나니까 그걸 참조해서 연락 주세요. 그리고 오실 때, 선생님의 수필집도 남은 게 있으면 한 권 부탁합니다.” 말씀드렸지. 그분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어.

이렇게 내가 손님과 점심식사 약속하는 것은 드문 일이란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그쯤 될 거야. 아무 손님하고나 그런 약속 하면 안 되거든. 인구 이십만은 넘는 도시라지만 얼마나 좁은 바닥이게? 그래서 나는…… 쉽게 점심약속을 잡지 않고 몇 달을 끌면서 그 손님이 어떠한 인간인지 잘 살펴보고서 약속에 응한다니까. 솔직히 여자 손님이 나한테 식사를 사겠니? 남자손님이니까 나한테 식사를 사는 거지. 그러니까 조심해서 응해야 하거든. 대개는 별 일 없이 식사나 하고 말지만 안 좋은 작자들도 있지.

예를 들어 작년의 어떤 사장님은 아주 점잖게 우리 가게를 다니면서 나를 잘 대해주다가, 내가 믿고 점심약속을 했더니 어떻게 나온 줄 아니? 중형차 큰 것을 몰고 나와 드라이브부터 하자며 외곽으로 나가더니 글쎄, 모텔 주차장으로 불쑥 들어가더라니까? 내가 어이가 없어서 아니 점심식사라더니 왜 이러시는 거에요?”했더니 뭐라 그러는 줄 알아? “방에 들어가서 식사를 부탁해도 다 갖다 줍니다. 걱정 마세요.”하는 것 있지? 미친놈의 새끼지! 내가 그냥 차에서 내려 도로로 뛰쳐나왔지 뭐니. 그 새끼가 아무리 힘센 놈이면 뭣하니? 벌건 대낮에 길바닥에서 나를 붙잡아 갈 수는 없잖아? 거기서 택시를 휴대폰으로 불러서 타고 왔지 뭐야. 괜히 점심도 굶고 비싼 택시비만 쓰고 말았지. 그 실없는 사장 새끼가 나를 매춘부로 보고 있었던 모양이야. 나 참!

아냐, 수필가인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니야.

내가 그분과 술잔을 나눈 지는 채 한 달도 안 되지만 나는 알아. 다른 남자였으면, 내가 각별히 대해준다는 느낌 하나만으로도 벌써 뻔질나게 우리 가게를 들르면서 수작을 건넸을 텐데 그분은 전혀 그런 기미도 없었잖아? 그 뒤로 기껏 세 번 들렀던가? 정말 보기 드문 점잖은 양반이야.

뭐라고 년아? 노인네니까 그 생각이 감퇴한 거라고? 이 년도 참, 그렇지 않아! 그분은 동안이라니까. 연세는 환갑 근처이지만 몸은 우리 또래야. 나도 참,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좋아. 네년 말대로 노인네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점잖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어떠냐? 나는 그런 푸근한 분 품에 그냥 한 번 안겨보고 싶어. ‘그거없이도 그냥 안겨서 잠이라도 푸근하게 자고 싶어. 그래그래, 농담이 아니야.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십년이나 부부생활도 못하고 사니? 여자 나이 사십대 말 오십대 초가 한창 부부 맛을 아는 나이라는데 나는 뭐니?

나는 이제는 지쳤단다. 남편 복이야 날아갔다 치고 애들 바라며 사는데 애들이야 얼마 안 있으면 다 제짝 찾아서 떠날 것 아니니? 그럼 내 인생은 뭐니?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이 나이에 밤잠 한 번 제 때 자지 못하고 밤샘 장사니?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해야 하니?

…… 미안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

다시 전화할 게.

 

오랜만이야.

이번 전화도 열흘만이지, 아마. 어쩜 그분은 무정하기 짝이 없니? 먼젓번에 내가 낮 열두 시경부터 시간이 난다는 말씀까지 드렸는데도…… 어떻게 전화 한 통화가 없니? 다른 손님 같았으면 점심약속이 이루어지자마자 당장 다음 날 낮에 전화를 걸거나, 길어 봤자 이삼 일 이내에 전화를 준다고. 그런데 그분은 네 말처럼 뭐가 감퇴한노인인지 영 연락이 없는 거야. 오늘까지 열흘째 그러네?

건강이 안 좋은 편이라더니 몸에 문제가 생긴 건가?’ 걱정도 들었다가, ‘혹시 내가 술장사 하는 년이라고 업신여기는 건가?’ 열 받아 봤다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집안에 무슨 힘든 일이 생겼나 봐.’하고 스스로 달래보기도 하면서 이렇게 열흘이 흘렀지 뭐니.

그래, 년아. 그분이 우리 가게에 왔었다면 내가 너한테 즉시 전화를 했겠지. 빨리 와서 그분 얼굴을 보라고 말이야. 그 약속을 내가 잊은 줄 알았니? 이제 오해가 풀렸니, 년아?

그나저나 고민이란다. 몇 번 되지도 않지만 내가 그분과 합석을 오래했더니 벌써 후유증이 생긴 것 같아. ‘다른 생맥주집에 갈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나를 보는 낙으로 우리 가게를 들른다는 손님들 중 삼십 퍼센트는 줄어든 느낌이야. 글쎄, 불경기가 심해져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위로가 되겠지만…… 내가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

단란주점도 아니고…… 이런 생맥주 집은 여주인의 역할이 결정적이란 말이야. 안주 만드는 솜씨는 기본이고 손님들을 아주 세심하게 대해 주어야 하거든. 손님들 섭섭하지 않게 적당히 합석해 주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단 얘기야. 내 나름대로 합석의 원칙도 정해 놓은 게 있단다. 들어볼래? 첫째 합석을 오래하지 않기. 어떤 손님과 오래 합석하면 다른 손님들이 삐칠 수 있거든. 사내들이 의외로 속이 좁다는 걸 너는 잘 모를 거다. 둘째 가급적 두루두루 여러 손님들과 합석하기. 그래야 보다 많은 단골을 확보할 수 있거든. 셋째, 합석을 원치 않는 손님은 그대로 두기. 손님에 따라서는 혼자 있기를 즐기거나, 아니면 애인이라도 기다리는 경우가 있거든. 그걸 헤아리지 못하고 합석했다가는 망신당한다니까.

부근의 생맥주집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거나 주인들이 바뀌지만 우리 가게는 유유장창 잘 나가는 비밀이 바로 나의 이런 합석 원칙 준수에 있었다는 것, 오늘 너한테만 알려준단다. 이거…… 절대 비밀로 해야 돼. 알았지?

나도 참.

그리운 임한테서 아무 소식 없으니까 영업비밀이나 밝히고…… 나도 이 장사 걷을 때가 되었나 보다. 폐경이 되면 우울증이 나타난다더니 내가 그 모양인가? 요즈음엔 다 집어치우곤 머리 깎고 산속으로 들어가 비구니로 살까 하는 생각도 불쑥불쑥 한다니까. 하하하하.

알았어, 년아. 그렇게 하려도 복분자주 생각나고 새끼들 생각나서 안 되겠지? 오늘은 얘기해 줄 소식도 없는데 괜히 전화했나 보다. 그래그래, 이만 끊을 게. 그럼…….

 

얘야, 어제 오늘 사이에 아주 대단한 드라마가 있었단다. 그분 얘기인데 이건 드라마나 다름없어. 잘 들어 봐. 그분이 어제 밤 자정 가까이 되어서 우리 가게를 들른 거야!

다른 때하고는 다르게 휘청거리는 걸음인 게 시내 어디서 일차를 하시고 들른 게지. 그 때 내가 다른 손님 맞은편자리에 합석해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거든. 그러다가, 그렇게 들어오는 그분을 보고는 후딱 자리를 일어나서 그분한테 갔다니까? 합석했던 손님한테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떡하니? 내 마음이 그런 걸.

그분은 많이 취해 있더라고. 내가 그분 주문대로 생맥주, 복분자주, 복숭아 통조림 안주까지 갖추어 가서 옆에 앉았지 뭐니. 그랬더니 그분이 무슨 큰 봉투 하나부터 내게 건네는 거야. 뭔가, 봉투를 열어봤더니 그분이 몇 해 전에 펴냈다는 수필집이더라고. ‘늦가을 강변에 서서라는 제목이지. 어떻게 술에 취해서 우리 가게로 오는 중에도 책을 흘리지 않고 왔는지, 너무나 고마워서 뭐라 말을 못하겠더라니까. 표지를 열고 안을 펼쳐 보니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더라. ‘열심히 사는 마담의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김호준 드림.’

귀중한 책을 잃으면 안 되니까 우선 그 책을 주방 안에 갖다 놓고 다시 그분 자리에 와 앉았지. 그분이 복분자주 병마개를 따서 술을 내 잔에 따라준 뒤 우리는 잔들을 부딪치고 우선 한 잔 마셨단다.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라던 말씀이 기억나서 내가 이런 말씀을 드렸어. “선생님한테 오늘은 맥주를 한 잔 이상 팔지 않겠어요. 선생님 건강도 안 좋으시다는데…….”

그랬더니 그분이 나를 빤히 보더니 내 두 손을 자기 손으로 끌어 모아서 꽉 쥐더라. 다른 손님들이 남아 있으니까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그냥 그러고 앉아 있었지 뭐니. 그 때 무슨 음악이 나온 줄 아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 웬투 유어 웨딩이 나오더라고. 그분은 영어 노랫말도 아는지 작은 소리로 흥얼흥얼 따라 부르더라니까. 그 노래가 끝날 즈음에 다른 손님들이 여기 계산이요.”하고 소리쳐서 나는 그 자리를 일어났지. 술값 계산을 마치고 다시 그분 맞은편자리에 앉았더니 이러시는 거야. “그 동안 내가 안 온다고, 전화 한 번 없다고 나를 원망했지? 나도 사실…… 마담이 좋아. 그래서 겁이 나는 거야. 마담과 사랑에 빠질까 봐 겁나는 거야. 이게 진심이야. 마담과 사랑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할 것 같거든. 다 늙은 놈이 그게 무슨 꼴이겠어? 그래서…… 그 동안 일부러 전화하지 않은 거야.”

알겠니?

얼마나 순진하고 문학적인 분이니! 그제야 나는 그분을 제대로 알 수 있겠더라고. 그분은 평생 살아오면서 외도 한 번 없이 살아온 분인 거야. 이런 분을 남편으로 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질투심도 나더라니까. 그분은 내가 부탁한 대로 생맥주 한 잔만 마시며 앉아 있고 나는 그분의 양해를 구한 뒤 복분자주 한 병을 마시며 육, 칠십 년대 팝송들을 말없이 들었단다.

다른 손님들도 다 나간 한 시경까지도 그렇게 나는 그분과 말없이 손을 잡고 앉아 팝송을 들었어. 그러다가 그분이 이만 가야겠다고 할 때 내가 솔직한 얘기를 했지. “선생님, 저도 선생님을 좋아해요. 저는요 선생님같이 좋은 분을 망가뜨릴 생각이 전혀 없어요. 선생님, 데이트는 데이트에요. 그 이상은 아니에요. 선생님이나 저나 같은 오십대 아닌가요? 이팔청춘은 아니니까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더 솔직한 말씀을 드릴까요? ……저는 선생님 품에 한 번 안기고 싶어요. 그뿐이에요. 한 번 안긴다 해서 문제가 생길 게 뭐가 있어요?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는 우리 둘의 비밀로 간직하면 되지 않겠어요? 이해하시겠어요?”

그분은 아무 말 없이 내 얘기를 다 듣고는 잡은 내 두 손을 다시 한 번 꼭 쥐었다가 풀면서 일어나서 갔어. 물론 계산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지. 그분은 어느 때부턴가 계산하실 때 잔돈은 그냥 두고 가신다니까. 나는 그분 뒤를 몇 발자국 따라가서 골목길에서 다시 말씀 드렸어. “‘늦가을 강변에 서서수필집, 너무 고맙고요…… 이삼 일 이내로 낮에 전화 주세요. 알았죠?” 하니까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갔지.

이게 어제 늦은 밤부터 오늘 새벽 한 시경에 걸쳐서 있었던 일이야. 정말 한 편의 드라마 같지 않니? 그래서 다른 때 같았으면 낮 열두 시는 되어야 잠에서 깨는데 오늘은 열한 시경에 일어났다니까. 세수와 기초화장까지는 해놓고 기다려야 되지 않겠니? 그래야 그분이 전화를 주는 대로 늦지 않게 나갈 수 있잖아.

그런데 지금이 오후 세시이니까…… 오늘은 전화 없이 그냥 지나간 거겠지?

내 짐작에는 그분이 어제, 오늘 새벽까지 술 마시며 다니느라 고단해서 늦게 일어나셨을 것 같아. 그러니 전화할 새가 있었겠니? 이런 정도의 추리는 기본이지. 그분이…… 내일 낮에 전화하실 거야. 틀림없어. 내가 그분과 만나고 난 뒤에, 나중에 너한테 얘기해 줄게.

, 나쁜 년 아니지? 나는 그분을 좋아하지만 우리 남편도 사랑해. 이제야 하는 얘기인데 먼젓번 산재병원에 갔을 때 우리 남편이 이러더라고. “나는 당신이 다른 좋은 남자가 있으면 연애도 하고 그랬으면…… 내 마음이 편하겠어.”

내가 남편한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더 말을 못하게 했지만…… 그래그래, 고마워. 역시 너는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친구야. 너도 우리 남편과 같은 마음이구나. 고마워. 이만 전화 끊을게.

내일이나 모레쯤 무슨 일 있고서, 그 때 다시 전화할게. 하하하하. 알았어. 그래그래, 하하하하.

 

 

☓ ☓

 

아무래도 말해줘야 할 것 같아 오늘은 내가 먼저 전화했단다. 네가 말하는 그분 내가 알아. 그분이 같은 아파트의 옆 동에 살거든. 그런데 그분이 괜찮은 분인 건 맞는데 딱한 사정이 있어. 아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동을 못하거든. 하필 그분이 퇴직하자마자이니까 일 년쯤 되지. 그래서 그분이 아내 수발을 드느라 외출도 잘 못한다고 소문나 있어. 요양보호사를 쓸 만도 한데 평생 내 뒷바라지 하다가 쓰러진 아내인데 어떻게 남한테 맡기냐며 거절한다고 해. 그나마 밤에는, 직장 다니는 아들이 퇴근하는 대로 교대해 줄 때가 있어서 바람을 쐰다더라.

나는 네 절친이잖니. 웬만하면 네가 그분과 각별한 정도 쌓고 그러려는데 찬물은 끼얹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더 이상 침묵하지 못하겠구나. 그분이 그런 사정이 있는 분이니까 낮에 시간을 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그러려니 하고 말아라. , 낮 시간에 전화가 와서 그분과 밖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그러면, 이건 내 생각인데, 그저 간단하게 식사나 하고 말아. 그게 그분의 어려운 가정을 생각한다면 맞을 둣 싶다.

? …… 우니? 미친년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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