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 양구에서도 물 맑은 동네 방산에는 백자 박물관이 있다. 산골에 이런 훌륭한 문화시설이 들어선 까닭이 있었다. 최선일(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한봉석(충북대학교 겸임교수) 두 분이 쓴양구 백자와 심룡 콘텐츠 전략이란 글의 일부를 소개함으로써 독자 여러분께 그 까닭을 짐작하도록 한다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일대는 수입천(水入川)이 흘러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물을 구하기 쉽고, 나무가 풍부하며 좋은 질의 백토가 풍부하여 백자 가마를 운영하기 좋은 지역이다. 이전에는 수동강(水同江)과 수입천의 합류 지점인 반구뫼에서 수로(水路)를 통해 경기도 광주 분원까지 사람과 물자를 운반하기 쉬웠다. 이와 같은 이유로 양구는 고려 말부터 근대까지 600여 년 동안 백자를 생산하였다. 특히,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양질의 태토는 조선시대 분원의 설립 때부터 지속적으로 제공되어 최고의 백자를 만드는 재료가 되었다.

양구 지역의 도자기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자기소와 도기소가 운영된다고 적혀 있다. 특히, 최근 보물로 지정된 이성계 발원 불사리 장엄구 일괄품에 포함된 5점의 백자는 이 지역에서 생산된 대표적인 백자이다. 이 불사리 장엄구는 1932년에 강원도 금강산에서 발견되었고, 사리기를 넣었던 두 점의 백자에 음각으로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 가운데 백자를 만든 장인이 방산사기장(方山砂器匠) 심룡(沈龍)’이라고 적혀 있어 1391년에 양구에서 활동한 사기장의 존재를 알려준다. 하지만 심룡이 만든 다른 작품은 드러난 것이 없고 남은 문헌도 많지 않아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명확히 밝힐 수 없다. -----"

 

무심이 지난해 12 양구 심룡 문학창작기행 참여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양구백자박물관과 가마터 등을 둘러보며 ‘방산 사기장 심룡어른을 알게 된 것이다. 귀가한 뒤, 제목을 방산 용이라 정해놓고 소설 쓰기 시작했다. 실존한 인물이라 상상력만으로 작품을 써서는 안 될 터. 고려 말 조선 초라는, 간단치 않은 역사적·사회적 상황을 공부해 가며 집필했다. 원고 분량은 적지만 일종의 역사소설이었다. 600여 년 전의‘방산 사기장 심룡이란 분이 과연 제대로 형상화됐을까?

판단은 독자 여러분께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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