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의 초벌구이나 재벌구이는 아낙네가 겪어야 하는 산고나 다름없다. 그럴 때 지아비는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용이는 가마 불을 지키며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있다.

아들 녀석은 오랜만의 여유에, 가마 부근 바닥에 깔아놓은 이불에서 마냥 퍼질러 자고 있다. 추운 밤 날씨임에도 이불을 냅다 걷어차기까지 하며 잔다. 용이가 그런 아들의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며 다시 가마 불을 살피려할 때 하늘에서 백토가루를 닮은, 때늦은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금강산에도 눈이 내리고 있을까? 그 비렁뱅이 왜구 놈이…… 추운 지난겨울을 잘 지냈을까?’

냇물에서 놈을 단 칼에 죽일 수 있었건만 용이는 칼을 거두고 말았다. 살아생전에 사람의 피를 칼에 묻히는 일 없이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그 날, 남은 사기그릇들을 다시 지게가지에 얹고 떠나는 용이 뒤에서 사내는 연실 아리가또우 고자이마스!’라 외쳤다. 그 후, 잇달아 용이한테 흰쌀이란 귀한 양식이 세 가마니나 생기고 비로봉에 봉헌하는 사리갖춤 일에 미천한 사기장이로서 한 역할 하는 영광까지 얻게 된 것은 그 냇물에서 하찮은 왜구일지언정 따듯한 자비심을 베풀었기 때문이 아닐는지.

 

먼동이 트기 전에 싸락눈이 그쳤다. 무겁게 뜬 해가 중천에 자리 잡을 때쯤에서야 초벌구이가 끝났다. 용이는 아들한테 피해 있으라.’ 당부한 뒤, 꽉 막아두었던 아궁이의 흙부터 긴 작대기로 부숴버렸다. 순간 뜨거운 열기가 가마 안에서 밖으로화악!’ 뻗쳐 나왔다. 다른, 막아뒀던 도수리구멍들의 흙도 다 부숴버리면서 가마 주위는 한동안 뜨거운 열기가 맴돌았다. 용이가 작대기를 땅바닥에 내려놓으며, 싸리비를 들고 선 아들한테 말했다.

뒷일은 네게 맡기마.”

네에 아버님. 그런데 제가 길의 눈을 비로 쓸기는 했는데…… 조심하셔야 합니다.”

뒷짐 지고 돌아선 용이를, 아내가 달려와 부축했다. 비로 눈길을 쓸어놓긴 했지만 아무래도 미끄러운 데다가, 잠까지 쏟아지는 지아비가 혼자 걸어오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내외는 조심조심, 칠십 보쯤 떨어진 집까지 눈길을 함께 걸어갔다. 사립문 따위는 달 필요가 없는, 마음씨 착한 사람들의 방산 마을이다. 용이는 편히 집 마당으로 들어선 뒤 아내한테 말했다.

고생 많구려.”

무슨 말씀을…….”

용이는 아내가 방문을 열어주자마자 그대로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코를 드렁드렁 곯으며 밀린 잠에 빠졌다. 아내는 지아비의 저고리와 바지를 조심스레 벗기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식량걱정 하나 없이 지난겨울을 났다. 흰 쌀이 세 가마니나 집에 들어오다니, 이게 꿈이 아닌가 싶어 자신의 손끝을 한 번 깨물어보기까지 했었다. 흰 쌀뿐인가. 소나무장작들까지 다섯 수레 분이나 집에 들어왔다.

이런 것이 다, 지난가을 장안사에서 보내준 것이다. 지아비가 장안사에서 하룻밤 묵은 뒤 빈 지게만 지고 편히 귀가한 다음 날, 장안사 젊은 스님들이 쌀 세 가마니와 많은 소나무장작들을 수레 둘에 나눠싣고 여기 집 앞까지 찾아와 내려놓고 돌아갔다.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 스님들은 세 번이나 더, 소나무장작들을 수레로 실어다 주었다. 그녀는 아직도 지난가을의 일만 떠올리면 자기도 모르게 합장한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사진 출처 : ​2017.01.28 | 오마이뉴스 | 다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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