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랜 세월 동안 서울 덕수궁 사건이 도대체 납득이 안 되었었다. 거대한 사기를 당한 것처럼 황당하게 끝난 결과도 그렇지만, 의욕 넘치던 그분이 황황히 자취를 감추고 만 일까지 떠올려 본다면 도대체가 납득이 안 되는 덕수궁 그리기 대회 사건이었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일까, 얼마 전 그 사건이 비로소 납득되었다. 그분은 우리한테 그림을 지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었다. 어린이 그림에 담겨져야 할 동심을 빠트린 것이다. 당시 일간 신문의 한 면을 가득 채웠던 입상 그림들만 봐도 기교보다는 천진난만한 동심이 넘쳐나고 있었다. 덕수궁 석조 건물이 투박하게 만화처럼 그려졌더라도 그 주위를 넘치는 즐겁고 산뜻한 색칠만으로도 그 그림은 충분했다. 어린이 그림이니까. 어린이는 동심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니까.

 

    단순한 석조 건물을, 갖가지 기교를 동원해서 어른처럼 원숙하게 그렸던 우리 학교 미술반원들의 그림은 당연히 입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분이 기대를 걸었던 내 그림은 그런 어린이 대상 그리기 대회가 아닌,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그리기 대회에서나 적합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 날 덕수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때, 여기저기서 자유롭게 사이다도 마시고 김밥도 먹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던 무심한 애들의 모습이 바로 그 그리기 대회의 정답이었다. 그런 애들의 그림에는 천진난만한 동심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덕수궁 사건은 내게 정신적 상처를 준 게 분명했다. 특별한 교육을 내세우는 교대부속초등학교에,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입학할 정도로 그리기에 재능을 보였던 나는 그 덕수궁 그리기대회 사건 이후로 그림에 영 흥미를 잃어버렸다. 같이 활동했던 다른 애들도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서로 궁금하지도 않을 정도로 우리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매주 이틀씩 한 가족처럼 붙어 다니며 그리기 활동에 매진하던 우리였었는데.

 

    그분은 우리에게 죄인일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의욕에 넘쳐서 열과 성을 다하여 그림을 가르치던 그분이 오랜 세월 뒤에만화를 그려도 좋고 낙서로 그려도 좋으니까 여하튼 떠들지만 마라는 어느 시골학교 교무과장 선생님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그분을 기억한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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