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발굽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지게를 지고 출발하려는데 사내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궁리하던 용이는 우선 눈에 뜨이는 땅바닥의 돌멩이들을 여러 개 주운 뒤, 바위 뒤고 숲이고 사방으로 마구 던졌다. 깃털 화려한 장끼 한 마리가 진달래 숲에서푸드득!’나타나 멀리 날아가고 뒤이어어버버!’소리치면서 싸리나무 숲에서 사내가 기어 나왔다. 무서움이 여전한 표정으로 말이다.

뭘 그리 무서워해?”

사내는 용이가 하는 말을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렇다면 아까 그들이 멀리서 말 타고 달려오던 소리는 어떻게 용이보다 먼저 들었는지, 영 앞뒤가 맞지 않는 벙어리 사내였다. 다시, 용이가 지게작대기를 짚으며 지게지고 일어서자 사내가 뒤에서 지게가지들을 붙잡아주었다. 조심조심 비탈진 고갯길을 내려가는데 땀은 다시 나지만 주위는 서늘해졌다. 하늘 한복판의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탓이다. 미시(未時)에서 신시(辛時) 사이쯤 되지 않을까. 늦가을 해는 짧아지는 해다. 정도사가 머지않았지만, 도착한 뒤 그릇 파는 일뿐만 아니라 스님이 힘들어 미뤘던 일들도 도와 드리려면 잠시도 지체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고개를 다 내려와서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폭이 마흔 자는 될 냇물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렇기도 하고 밀삐에 어깨 살갗이 다 벗겨졌는지 몹시 쓰라렸다. 갈증 나는 목도 축여야 했다. 지게를 일단 냇가에 세워놓고 용이는 엎드린 자세로 흐르는 냇물을 훌쩍훌쩍 들이켰다. 오장육부가 시원해졌다. 그런 뒤 웃옷을 벗어, 벗겨진 어깨의 살갗 부분을 찬 냇물로 여러 번 씻었다. 이래놓아야 덧나는 걸 방지한다.

냇물이 얼마나 맑은지 바닥의 조약돌들이 남김없이 다 보였다. 그런데 흐르는 물살에 모난 데가 다 다듬어져 동글동글한 모양들뿐이다. 용이는 짚신들을 벗고 맨발로 물속의 조약돌들을 한 번 밟아보았다. 짐작대로 여간 매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냥 짚신을 신고서 간다면 조약돌에 미끄러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냇물을 건넌 뒤 물에 젖은 축축한 짚신으로 길을 걸을 걸 생각하니, 짚신은 짚신대로 쉬 망가져버리고 발이 짓물러질 게 뻔해서 영 내키지 않았다. ‘집을 나설 때 짚신 한 켤레쯤 여분으로 챙겼더라면 좋았을 것을!’용이는 한탄했다.

게다가, 냇물이 어떤 데는 검푸르게 깊고 어떤 데는 연한 빛으로 얕아서 고른바닥도 못 됐다. 일정한 간격으로 큰 돌들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가 눈에 뜨이긴 하지만 사기그릇 가득 얹은 지게 지고 가기에는 위험천만이다. 천생, 고개를 내려올 때처럼 사내가 뒤에서 지게가지를 붙잡아주며 내를 건너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사내가 또 보이지 않았다.

이 비렁뱅이자식이 그 새 어디 갔어?”

다리를 저니 멀리 달아나지는 못 했을 것 같다. 용이는 근처 떡갈나무의 굵은 가지 하나를 꺾어들었다. 그것을 휘두르며 부근 숲을 뒤졌다. ‘후다닥!’소리가 난 곳을 봤더니 노루였다. 송아지만 한 노루가 기겁해서 겅중겅중 숲속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웃옷도 채 걸치지 못한 꼴로 숲을 뒤지느라 용이의 상반신은 나뭇가지나 풀잎에 여기저기 긁혔다. ‘이 자식을 놓쳤구나!’체념하며 숲을 나오려는데 가까운 바위 뒤에서 사내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겁먹은 얼굴로 나타났다.

상반신의 긁힌 상처들을 냇물에 여러 번 씻고 난 용이는,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대신 등태 속의 그 칼을 다시 빼들었다. 길이가 한 자밖에 안 되지만 날이 잘 서 있다. 백자를 열 점이나 대장장이한테 주고 장만한 거다. 사내가 듣거나 말거나 용이는 사나운 낯으로 말했다.

자네 말이야, 내가 그만 따라와도 된다고 할 때까지는 나를 따라와야 해. 만일 또 제멋대로 달아났다가는 그 때는 이 칼로 죽여 버릴 거다.”

고개를 다 내려가면 전대의 볶은 콩들을 다 주겠다고 한 약속은 얼버무려졌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세상은 강자가 하자는 대로 약자가 순종하며 돌아가기 마련 아닌가.

이 냇물을 건너고 나면, 정도사까지 오 리쯤 된다. 십 년 전 천도재를 지내려고, 단발령 고개 너머에서 가장 가까운 절을 찾다가 정도사를 만난 것이다. 사실상 오늘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 그렇다면…… 이 냇물만 건너면 사내를 풀어주자. 남은 볶은 콩들도 그 때 주자. 벙어리가 다리를 절면서 여기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꽤 고맙지 않나?

사실 말이 오 리지, 산길 오 리를 혼자 무거운 지게를 지고 갈 걸 생각하면 쉬운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용이는 다시 좋게 마음먹었다. 하긴 냇물이 거울처럼 맑고, 붉거나 노랗거나 한 단풍들이 지천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가을 풍경 속에서 마음을 모질게 먹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용이는 벗은 짚신 켤레를 새고자리에 매단 뒤 바지 대님을 풀었다.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는 지게를 지었다. 사내의 도움을 뒤로 받으며 냇물로 조심조심 들어섰다. 얼음장같이 찬 냇물에 발가락들이 다 얼어 떨어져버릴 것만 같다. 참아가며, 매끄러운 조약돌들을 조심조심 밟으며 나아간다. 연한 물빛으로 얕은 데는 걷기가 괜찮지만 검푸른 물빛으로 깊은 데는 허리춤 가까이 냇물에 젖어, 사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고생깨나 했을 게다.

내를 거의 다 건너는가 싶었는데 긴장이 풀어진 탓일까, 결국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지게 뒤의 사내가 바닥의 매끄러운 큰 돌에 휘청미끄러지면서 지게가지에 얹힌 사기그릇 스무 점 가까이가 물에 떨어져 버렸다. 물 깊은 곳이었다면 충격이 덜해 덜 상했을 텐데 얕은 데라 바닥의 조약돌들에 세게 부딪치며 대부분 금이 가거나 깨져버렸다. 용이가 몸을 재빨리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큰 일 날 뻔했다. 용이는 본능적인 동작으로 지게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몸을 돌려 지게가지에 남은 그릇들을 두 팔로 안았다.

냇물에 자빠지며 입은 저고리가 반 가까이가 벗겨진 사내가 처연한 낯으로 용이를 올려다보았다. 그 때 사내 가슴에 검게 문신된 한 글자이 용이의 눈에 뜨였다. 섬광처럼 사내의 정체를 깨달았다. 사내는 왜구였다. 용이는 두 팔로 안은 그릇들을 냇가에 내려놓고는 지게 등태에서 칼을 빼들었다.

이 개새끼!”

다스케테! 다스케테!”

두 손을 비비며 연실 외치는, 애걸하는 표정으로 봐살려 달라는 왜놈 말인 듯싶다.

이 개새끼야. 우리 아버님이 니네 칼에 돌아가셨어. 이 원수 놈의 개새끼!”

도우조 다스케테! 도우조 다스케테!”

어떻게 왜구 새끼가 풍악산 일대를 떠돌고 있었을까. 약탈하러 동해안에 왔다가 다리를 다치면서 낙오된 놈이 아닐까. 용이가 쳐든 칼 앞에서 이제는 삶을 체념한 듯 두 눈을 감고서 합장 자세로 물속에 앉아 있는 사내였다. 그 때 잠자리 한 마리가 부근 하늘을 맴돌다가 용이의 높이 쳐든 칼끝에 무심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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