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금강산을 풍악산이라고도 부른다.
용(竜)이가 사내를 만난 곳은 풍악산 초입인 단발령 고갯마루다. 사기그릇들을 잔뜩 얹은 지게를 지겟작대기로 간신히 세워놓고 그 그늘에 앉아 쉬려할 때 산발한 사내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사내가 용이보다 먼저 고갯마루에 와 있다가 다가온 건지도 모른다. 용이는 지게 위 그릇들이 무겁고 조심스러워 땅만 내려다보며 고개를 올라왔으니까.
사내는 상투도 못 틀고 산발한 데다가, 길바닥에서 지내는지 옷차림도 걸레처럼 더러웠다. 짚신도 못 신은 맨발이었다. 지게 그늘에서 쉬려다가, 느닷없이 기괴한 꼴로 나타난 사내에 기겁한 용이. 하마터면 지겟작대기를 건드려 그릇들을 다 깨트릴 뻔했다.
그렇게 놀라게 했다면‘아이고 죄송합니다’ 같은 사과의 말이라도 건네야 옳지 않을까. 하지만 사내는 그런 말은커녕 괴이한 소리를 내었다.
“어버버!”
“이 사람, 뭐하자는 거야?”
용이는 본능적으로 지게 등태에 숨겨두었던 칼을 찾아 빼들었다. 세상이 흉흉한 탓에 먼 길을 다닐 때에는 이런 칼 하나는 비치해야 했다. 사내는 서슬 퍼런 칼에 놀라 무릎 꿇고 앉더니, 두 손을 비비며 다시‘어버버’소리를 냈다. 그제야 용이는 상황을 알아챘다. 사내는 말 못하는 벙어리였다. 용이는 칼을 다시 지게 등태 속에 넣었다. 그러자 사내 표정이 밝아지더니 이번에는 웬 작은 보따리를 두 손으로 바친다. 용이가 그 보따리를 받아 풀어보았다. 머루 다래만 가득했다. ‘숲에 들어가면 지천인 게 머루 다래일 텐데, 이걸 바친다고?’하는 어이없다는 생각에 보따리를 되돌려주려 하자 사내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용이 지게가지 끝에 붙들어 매단 전대를 가리켰다. 전대에는, 용이가 오늘 새벽 방산에서 길을 나설 때 아내가 볶아준 콩 열두 홉이 들어 있다. 사내 행동이 짐작 갔다. 보따리의 머루 다래를 드릴 테니 그 전대에 들었을 식량 좀 받아먹고 싶다는 뜻이다. ‘바꿔먹자’는 것 같지만 사실 구걸하는 거나 다름없다. 사내는 그 동안 산에서 머루 다래 같은 산열매나 따 먹으며 연명하느라 지친 것일까.
이 단발령 고개를 내려가면 내금강이다. 내금강에는 절이 많다. 더러, 전란 중에 불타버린 절도 있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절이 무사하며 특히 정도사(正道寺)가 예전처럼 불사를 정상적으로 유지한다기에 용이는 쌀을 얻어올 희망을 가졌다. 십 년 전, 어머님의 천도재를 정도사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마음 푸근한 주지 스님이 용이가 지게에 지고 가는 사기그릇 오십 점 정도는 흔쾌히 받으시며, 그 값으로 공양미로 쓰이는 쌀 한 가마니를 성큼 내주실 게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진 용이는 애절히 구걸하는 사내한테 인심 한 번 쓰기로 했다. 전대를 풀어 볶은 콩 두 홉쯤 꺼내 건넨 것이다. 사내는 얼른 땅바닥에서 일어나면서 두 손으로 볶은 콩들을 받더니 이내‘으직으직’씹어 먹기 시작했다. 볶은 콩이 얼마나 고소하던지, 애절했던 사내의 표정이 순식간에 행복해졌다. 용이는 어이없어 하다가 보따리에서 머루 서너 알을 꺼냈다. 하지만 쉰내에 먹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자신도 전대에서 볶은 콩을 한 홉쯤 꺼내 입안에 털어 넣고 사내처럼 ‘으직으직’씹어 먹기 시작했다. 이제 전대에 볶은 콩이 아홉 홉쯤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