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나는 춘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한 번도 같은 반에 있어 본 적이 없이 3년을 보내고 강원대학을 갔다.

강원대학에서는 과가 달랐다. 친구와 내가 학창시절 같은 반에서 공부한 것은 춘천중학교 시절밖에 없는 것이다. 강원대학을 다닐 때 나는 학업에 관심이 없었다. 문학회 회원들과 문학 얘기로 소일하기 일쑤였다. 정작 글 쓰는 일보다 문학 얘기로 세월을 보낸 것 같아, 후회막급이다. 저렴한 막걸리 집이 문학회 모임의 주된 장소였다.

전 날 마신 술이 덜 깬 채 캠퍼스를 다닐 때가 잦았다. 나는 그랬지만 친구는 도서관에서 지내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사범대로 이름이 바뀌는데 교육학부를 다니는 나와 다르게 친구는 법경학부였다. 70년대 초반의 강원대학 캠퍼스는 열악하기 그지없어서 하나뿐인 도서관이라는 게 몇 십 평밖에 안 될 단층 건물이 고작이었다. 그곳에서 늘 공부에 매진하는 학우들이 몇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친구였다.

캠퍼스가 넓지 않아 친구와 나는 더러 마주치곤 했다. 도서관에서 밤샘 공부를 하는지 친구의 두 눈은 충혈돼 있을 때가 많았다. 우리는 말은 하지 않아도 소리 없이 웃으며 지나가곤 했다.

그 즈음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어머니가 며칠 만에 본 내게 친구와 친구 아버지를 거론하며 말했다.

얼마나 생활력이 좋은 부자(父子)인지, 글쎄, 속초에서 생선을 여러 상자 떼다가 중앙시장에서 팔고 있지 않더냐! 창피하게 생각지도 않고 시장 한복판에서 그러다니 정말 대단한 아버지와 아들이다. 그런데 우리 집은, 네 아버지는 먹고사는 일에는 관심 없고 체면만 차리니……내가 속이 탄다 타!”

 

이 얘기를 어제 친구한테 하자, 친구가 반쯤은 오해하셨다면서 해명해 주었다.

우리 아버지와 친한 분이 속초에 살고 계셔서 선물로 생선을 여러 상자 보내주신 거야. 요즈음은 동해바다 생선들이 씨가 말랐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지. 우리 식구가 그 많은 생선들을 다 먹을 수 없으니, 버릴 수도 없고 해서 아버지를 따라 중앙시장에 가서 팔아버리려 했던 거지. 결과를 말한다면, 한 상자도 못 팔았단다. 하하하.”

그 즈음 친구 아버지는 교육회에서 간사로 일했고, 우리 아버지는 예총 도지부장을 했다. 친구 아버지는 교육회에서 봉급을 받았으나 우리 아버지는 사실상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자리라 오히려 집안의 재산을 축내고야 말았다. 예를 들어 1968년인가, 할아버지한테서 상속받은 작은 야산을 헐하게 팔아버린 게 그 한 예다. 그 때 마련한 돈으로 아버지가 이룬 예총 사업이 의암호 가에 있는 펜촉 모양의 김유정 문인비 건립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세월이 흘렀다. 내가 친구와 재회한 것은 1979107일이다. 장소는 공지천 가에 선 어느 2층 건물의 1층에 있는 카페였다. 나는 그 즈음 동해안의 모 고등학교 총각 교사였는데 휴일을 맞아 어떤 처녀 선생을 만나려고 춘천으로 새벽같이 버스를 타고 온 것이다. 그녀와 나는 그 해 여름방학 때 강원대학교에서 강습을 한 달 간 같이 받으며 알게 됐고강습이 끝난 뒤 한 번 만나자고 약속했었다.

 

<처녀 총각이 만나는 일만큼 기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우리 아들 녀석이 스물아홉 살 나이가 되자, 바쁜 시간을 내어 같은 직장 처녀를 만나고 하더니 마침내 올 봄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아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아비처럼 딱 스물아홉 나이에 부리나케 배필을 찾아나서는 데 아비는 놀랐다. 처녀 총각이 때가 되어 자기 짝을 찾아나서는 일이야말로 자연의 섭리이면서, 국가의 미래를 담보하는 대단한 장거가 아닐까. 지난 6·70년대에 산아제한 같은 모자란 정책을 편 탓에 머지않아 우리나라가 심각한 인구절벽 사태에 직면할 거라는 뉴스가 나오는 요즈음이다.>

 

그녀는 서울의 모 중학교 교사이기 때문에, ‘107일 낮 12시 공지천 가의 카페약속 만남을 위해 서울 청량리에서 경춘선 기차를 타고 내려오기로 전화 통화가 전 날 되었다.

12시가 되려면 아직 30분은 남았다. 그래도 초조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창밖의 공지천을 보다가, 출입문을 보다가 하는데 그 때 새 양복 차림의 친구가 출입문에 등장하는 게 아닌가. 친구는 나를 발견하곤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와 아주 고마워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사태를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친구가 그 날 같은 건물의 2(무슨 회관의 식장이었다.)에서 결혼식을 치르기 직전에 1층 카페에 잠시 내려왔다가 나와 조우한 것이다. 친구는 청첩도 못했는데 결혼식에 내가 알아서 와 준 거라 판단하고는 내 두 손을 잡으며 고마워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오해를 빚기도 한다.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어제 친구한테 ‘1979107, 공지천 가의 카페에서 벌어진 오해37년만에 해명하였다. 그리고는 함께 허허허 웃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어이없는 오해 사건마저 이제는 그리워진 게 아닐까?

친구가 결혼식을 올린 그 날은, 춘천의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피천득씨 수필인연의 마지막 대목대로였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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