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중학교 1학년 때의 특수반 담임은 수학을 가르쳤다. 1·4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 와 자리 잡은 분이라 했다. 그분에게는 엉뚱한 면모가 있었다. 학교에서 체육대회가 벌어졌는데 그분이, 학생들의 응원 모습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는 스스로 나서서 응원 지도를 한 것이다. 키도 작고 짧게 이발하고 다니며, 게다가 어려운 수학을 가르치는 분이 갑자기 무용선생이라도 된 듯 온몸으로 현란한 응원동작을 보이다니…… 학생들은 놀라며 환호했다.

그 즈음, 단체로 그 먼 석사동의 교대까지 걸어간 적도 있었다. 무슨 경기를 응원하러 간 듯싶은데 정작 경기의 내용보다 내 명찰을 풀밭에 잃어버린 기억만 생생하다. 강원도 내 제일 가는 중학교라는 자부심 때문인지, 명찰 하나도 평범치 않았다. 플라스틱으로 된 직사각형 명찰이었다. 학년 전체가 줄을 맞추느라 움직이는 중에 내 상의 가슴에 단 그 명찰이 풀밭에 떨어졌는데 색이 녹색이어서 전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환갑이 넘은 지금도 나는 교대 캠퍼스만 보면 1964년 어느 날 그 풀밭에서 잃은 명찰을 떠올린다. 헝겊이 아닌 플라스틱이어서 분명 그 풀밭 어딘가에 남아 있을 텐데 하는 환상을 어쩌지 못한다. 만일 기적적으로 그 명찰을 몇 십 년 만에 되찾는다면 소설 한 편이 창작될 것이다.

 

2학년이 되면서 친구와 나는 각기 다른 반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일 년 뒤 다시 같은 반이 되었는데 그 반이 ‘3학년 2이다. 영어를 가르치는 여선생이 담임이었다.

친구가 어제 말했다.

지금도 3학년 2반 때 담임선생님을 가끔씩 뵈어.”

? 여태 살아계시단 말이야?”

그럼. 그런데 아주 많이 늙으셨어. 우리 아버님이 1·4 후퇴 때 피난 오셨는데 그 고향 분들의 모임이 있거든.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내가 그 모임을 나가는데 거기서 담임선생님을 뵙지. 내외가 함께 나오시는데 두 분 다 6·25 때 피난 온 분들인 거야. 나를 보면 아직도 기억하고 반가와 하신다니까.”

그것도 참!”

내가 감탄한 것은 두 가지 의미일 게다.‘이 좁은 춘천에 625동란 때 피난 와 사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중학교 3학년 2반 담임선생이 여태 제자(친구)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다. ‘이제는 많이 늙어 할머니가 되었다니!’하는 인생 무상함에 대한 탄식도 섞였을 게다.

1966년도 춘천중학교 3학년 2반은, 당시 그 수()가 극히 드문 여선생이 담임한 반이자, 특수반이었다.

 

<1학년 때에 이어 3학년 때도 특수반이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니까 이 수필을 읽는 이들한테 어떤 저항감을 줄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친구와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상대를 잊지 않고 어떤 유대감을 유지해온 상황을 설명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수필을 읽는 분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특수반이라 해도 학생들을 일학년 때처럼 성적 순으로 앉힌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학급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다만 여선생이라 그랬을까, 학생들이 괜히 말을 잘 듣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 해 봄 소풍날이었다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한 그 날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친구가 스마트폰에 담아온 것이다. 썩기 시작하는 고목 위에 셋이 서서 제 각기 포즈를 취했는데 친구만 단정한 교복 차림일 뿐 나와 또 다른 한 친구는 교복 상의 단추들을 풀어 제친 차림이다.

20171, 풍물시장의 어느 식당에 앉아서 60년 전 어느 봄날의 앳된 우리 모습을 목격하다니, 순간 갖가지 감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진 속의 나는 태평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광풍노도로 비유되는 격한 사춘기를 맞은 데다가, 하루하루가 어려운 가정환경 탓이었다. 아버지의 실직이 장기화되면서 집안의 분위기는 매우 어두웠었다. 그렇다. 내가 이 무렵부터 학교 공부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되면서 잡념이 많아졌는데 가정환경까지 열악하니, 자연히 공부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거다.

그런 심적 상황을 내재했으면서도 사진기 앞에서는 봄 소풍을 온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

결국 이 사진을 소재로 글 쓰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수필을 쓰게 된 까닭이다.

 

문득 그 소풍 날 있었던, 어떤 일이 선하게 떠올랐다J라는 친구가 벌인 사건이다. 요즈음과 달리 그 때는 사진기가 아주 귀했다. J가 사진기를 갖고 와 학급 사진을 찍겠다고 담임선생한테 말했다. 담임선생을 가운데 앉히고 반 학생들이 어렵게 기념사진포즈를 잡았다. 50명 되는 인원이 단체 사진을 찍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딴 데 가 있는 반 아이를 찾아오고 앞의 키 큰 놈은 좀 앉아 있어!’ 소리치고, 여 담임은 옷맵시를 다시 한 번 살피고…… 그렇게 공을 들인 후 J가 마침내 사진을 찍었다.

J는 나와 아주 친했다. 나중에 J가 나한테만 비밀을 털어놓았다.

필름도 없이 사진 찍었어. 장난 한 번 친 거지.”

J의 무모한 장난 또한 담임이 여선생이라 그랬을 것이다. 당시 3학년 2반 학생들 중에는 괜히 여 담임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골탕을 먹였으면 하는 애들이 있었다. 사춘기가 그 원인이라 나는 판단한다.

그 시절 내가 J와 어울리면서, 수업이 끝난 뒤 둘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벌인 못된 짓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로 작품으로 써 남길 것이다.

J하고는 친하게 어울렸으면서 정작 친구와는 소풍 날 함께 사진 한 장 찍은 것 이외에는 어울린 기억이 없다니,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환갑 넘어서도 잊지 않고 안부를 전하고 시간을 내어 풍물시장 한 식당에서 술잔을 나누었다니 어찌된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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