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는 성적으로 대단한 과도기이다. 무심이 고등학교를 다닌 60년대 말, 그 때 겪은 사춘기의 모습 중 한 부분을 글로 써 남긴 게 승냥이.

명문고를 다닌다 해도 사춘기가 생략되는 게 아니었다. 잿빛 눈동자를 한 친구는 밤마다 공설운동장을 누비는 Lady killer였고 다른 한 친구는 사창가 출입을 일삼다가 결국은 몹쓸 병에 걸려 자퇴했다. 그런 병 정도는 치료가 되었을 텐데 자퇴까지 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 부모님이 너무나 실망이 커서이런 자식은 더 이상 공부시킬 필요가 없다!’면서 자퇴원을 내도록 했던 게 아닐까. 요즈음 같아서는 있을 수 없는 어르신들의 독단이지만 그러나 60년대는 극히 당연한 조치일 수 있었다.

밤마다 공설운동장을 누비던  Lady killer 친구얘기와 사창가 출입을 일삼다가 몹쓸 병에 걸려 자퇴한 친구얘기를 하나로 혼합해 완성한 작품이 무심의승냥이인 것이다.

 

정작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쓰지 못했고 몇 년 지난 대학교 3학년 때 쓴 것이다. 그 때가, 박정희 대통령이토착적 민주주의라는 궤변으로 유신을 선포한 1972년 늦가을이었다. 대학가에 휴교령까지 내려져 하릴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글 쓰는 선배가 찾아왔다. 무심을 보고 싶다며 먼 시골에서 올라온 것이다. 하릴없던 무심은 그 선배를 따라 시골로 내려갔다.

시골에서 가재나 잡아 삶아먹으며 며칠을 보내다가우리 이러지 말고 각자 작품을 씁시다하여 무심이 두어 시간 만에 완성한 게 승냥이였다. 200자 원고지로 50매쯤 되었다. 휴교령이 해제되고 이듬해, 무심은 교지에 이 작품을 발표했다. 그 후 여학생들이 무심을 승냥이의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접근 자체를 꺼리면서…… 정말 외로운 날들을 보내야 했다. 기가 막히다. 어떻게 작품을 쓴 사람과 작품 속 주인공을 혼동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시절, 70년대 초는 그러했다.

 

올해 생애처음으로 작품집을 내기로 했을 때 그런 박대를 받은 작품 승냥이를 복권시키기로 무심은 마음먹었다. 내용을 보완해서 200자 원고지로 70매 가량 되는 승냥이가 완성돼 활자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출발은 짐승이다. 어느 때가 되면 발정 난 짐승 같은 시기를 겪기 마련이다. ‘승냥이란 작품은 그런 측면에서 감상해야 한다. 내용 전개 상 거친 표현과 낯 뜨거운 묘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무식한 어느 동창 놈이 대학 시절 교지에 실린승냥이를 읽고 난 뒤 말했다.

2의 방인근이 나타났구먼!”

당시에 방인근이란 음란소설 작가가 있었다. 무심은 그 때부터 그 동창 놈을 아주 무식한 놈으로 여긴다. 어떻게, 음란소설과 순수소설을 구별도 못하는 놈이 국문과를 나오고 나중에 국어선생까지 했는지 난해할 뿐이다.

 

한 편, 이 소설을 쓸 때 어울렸던 선배는 훗날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유명작가가 되었다.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 것이다. 지금은 소원해진 사이라 그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훗날 때가 되면 그 이름을 밝힐지 모른다.

 

작가에게 작품은 그의 자식이다. 비록 거칠고 낯 뜨거운 내용이 많지만 무심은 작품승냥이를 사랑한다. 몸으로 직접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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