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야.

이번 전화도 열흘만이지, 아마. 어쩜 그분은 무정하기 짝이 없니? 먼젓번에 내가 낮 열두 시경부터 시간이 난다는 말씀까지 드렸는데도…… 어떻게 전화 한 통화가 없니? 다른 손님 같았으면 점심약속이 이루어지자마자 당장 다음 날 낮에 전화를 걸거나, 길어 봤자 이삼 일 이내에 전화를 준다고. 그런데 그분은 네 말처럼 뭐가 감퇴한노인인지 영 연락이 없는 거야. 오늘까지 열흘째 그러네?

건강이 안 좋은 편이라더니 몸에 문제가 생긴 건가?’ 걱정도 들었다가, ‘혹시 내가 술장사 하는 년이라고 업신여기는 건가?’ 열 받아 봤다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집안에 무슨 힘든 일이 생겼나 봐.’하고 스스로 달래보기도 하면서 이렇게 열흘이 흘렀지 뭐니.

그래, 년아. 그분이 우리 가게에 왔었다면 내가 너한테 즉시 전화를 했겠지. 빨리 와서 그분 얼굴을 보라고 말이야. 그 약속을 내가 잊은 줄 알았니? 이제 오해가 풀렸니, 년아?

그나저나 고민이란다. 몇 번 되지도 않지만 내가 그분과 합석을 오래했더니 벌써 후유증이 생긴 것 같아. ‘다른 생맥주집에 갈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나를 보는 낙으로 우리 가게를 들른다는 손님들 중 삼십 퍼센트는 줄어든 느낌이야. 글쎄, 불경기가 심해져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위로가 되겠지만…… 내가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

단란주점도 아니고…… 이런 생맥주 집은 여주인의 역할이 결정적이란 말이야. 안주 만드는 솜씨는 기본이고 손님들을 아주 세심하게 대해 주어야 하거든. 손님들 섭섭하지 않게 적당히 합석해 주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단 얘기야. 내 나름대로 합석의 원칙도 정해 놓은 게 있단다. 들어볼래? 첫째 합석을 오래하지 않기. 어떤 손님과 오래 합석하면 다른 손님들이 삐칠 수 있거든. 사내들이 의외로 속이 좁다는 걸 너는 잘 모를 거다. 둘째 가급적 두루두루 여러 손님들과 합석하기. 그래야 보다 많은 단골을 확보할 수 있거든. 셋째, 합석을 원치 않는 손님은 그대로 두기. 손님에 따라서는 혼자 있기를 즐기거나, 아니면 애인이라도 기다리는 경우가 있거든. 그걸 헤아리지 못하고 합석했다가는 망신당한다니까.

부근의 생맥주집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거나 주인들이 바뀌지만 우리 가게는 유유장창 잘 나가는 비밀이 바로 나의 이런 합석 원칙 준수에 있었다는 것, 오늘 너한테만 알려준단다. 이거…… 절대 비밀로 해야 돼. 알았지?

나도 참.

그리운 임한테서 아무 소식 없으니까 영업비밀이나 밝히고…… 나도 이 장사 걷을 때가 되었나 보다. 폐경이 되면 우울증이 나타난다더니 내가 그 모양인가? 요즈음엔 다 집어치우곤 머리 깎고 산속으로 들어가 비구니로 살까 하는 생각도 불쑥불쑥 한다니까. 하하하하.

알았어, 년아. 그렇게 하려도 복분자주 생각나고 새끼들 생각나서 안 되겠지? 오늘은 얘기해 줄 소식도 없는데 괜히 전화했나 보다. 그래그래, 이만 끊을 게. 그럼…….

 

얘야, 어제 오늘 사이에 아주 대단한 드라마가 있었단다. 그분 얘기인데 이건 드라마나 다름없어. 잘 들어 봐. 그분이 어제 밤 자정 가까이 되어서 우리 가게를 들른 거야!

다른 때하고는 다르게 휘청거리는 걸음인 게 시내 어디서 일차를 하시고 들른 게지. 그 때 내가 다른 손님 맞은편자리에 합석해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거든. 그러다가, 그렇게 들어오는 그분을 보고는 후딱 자리를 일어나서 그분한테 갔다니까? 합석했던 손님한테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떡하니? 내 마음이 그런 걸.

그분은 많이 취해 있더라고. 내가 그분 주문대로 생맥주, 복분자주, 복숭아 통조림 안주까지 갖추어 가서 옆에 앉았지 뭐니. 그랬더니 그분이 무슨 큰 봉투 하나부터 내게 건네는 거야. 뭔가, 봉투를 열어봤더니 그분이 몇 해 전에 펴냈다는 수필집이더라고. ‘늦가을 강변에 서서라는 제목이지. 어떻게 술에 취해서 우리 가게로 오는 중에도 책을 흘리지 않고 왔는지, 너무나 고마워서 뭐라 말을 못하겠더라니까. 표지를 열고 안을 펼쳐 보니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더라. ‘열심히 사는 마담의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김호준 드림.’

귀중한 책을 잃으면 안 되니까 우선 그 책을 주방 안에 갖다 놓고 다시 그분 자리에 와 앉았지. 그분이 복분자주 병마개를 따서 술을 내 잔에 따라준 뒤 우리는 잔들을 부딪치고 우선 한 잔 마셨단다.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라던 말씀이 기억나서 내가 이런 말씀을 드렸어. “선생님한테 오늘은 맥주를 한 잔 이상 팔지 않겠어요. 선생님 건강도 안 좋으시다는데…….”

그랬더니 그분이 나를 빤히 보더니 내 두 손을 자기 손으로 끌어 모아서 꽉 쥐더라. 다른 손님들이 남아 있으니까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그냥 그러고 앉아 있었지 뭐니. 그 때 무슨 음악이 나온 줄 아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 웬투 유어 웨딩이 나오더라고. 그분은 영어 노랫말도 아는지 작은 소리로 흥얼흥얼 따라 부르더라니까. 그 노래가 끝날 즈음에 다른 손님들이 여기 계산이요.”하고 소리쳐서 나는 그 자리를 일어났지. 술값 계산을 마치고 다시 그분 맞은편자리에 앉았더니 이러시는 거야. “그 동안 내가 안 온다고, 전화 한 번 없다고 나를 원망했지? 나도 사실…… 마담이 좋아. 그래서 겁이 나는 거야. 마담과 사랑에 빠질까 봐 겁나는 거야. 이게 진심이야. 마담과 사랑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할 것 같거든. 다 늙은 놈이 그게 무슨 꼴이겠어? 그래서…… 그 동안 일부러 전화하지 않은 거야.”

알겠니?

얼마나 순진하고 문학적인 분이니! 그제야 나는 그분을 제대로 알 수 있겠더라고. 그분은 평생 살아오면서 외도 한 번 없이 살아온 분인 거야. 이런 분을 남편으로 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질투심도 나더라니까. 그분은 내가 부탁한 대로 생맥주 한 잔만 마시며 앉아 있고 나는 그분의 양해를 구한 뒤 복분자주 한 병을 마시며 육, 칠십 년대 팝송들을 말없이 들었단다.

다른 손님들도 다 나간 한 시경까지도 그렇게 나는 그분과 말없이 손을 잡고 앉아 팝송을 들었어. 그러다가 그분이 이만 가야겠다고 할 때 내가 솔직한 얘기를 했지. “선생님, 저도 선생님을 좋아해요. 저는요 선생님같이 좋은 분을 망가뜨릴 생각이 전혀 없어요. 선생님, 데이트는 데이트에요. 그 이상은 아니에요. 선생님이나 저나 같은 오십대 아닌가요? 이팔청춘은 아니니까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더 솔직한 말씀을 드릴까요? ……저는 선생님 품에 한 번 안기고 싶어요. 그뿐이에요. 한 번 안긴다 해서 문제가 생길 게 뭐가 있어요?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는 우리 둘의 비밀로 간직하면 되지 않겠어요? 이해하시겠어요?”

그분은 아무 말 없이 내 얘기를 다 듣고는 잡은 내 두 손을 다시 한 번 꼭 쥐었다가 풀면서 일어나서 갔어. 물론 계산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지. 그분은 어느 때부턴가 계산하실 때 잔돈은 그냥 두고 가신다니까. 나는 그분 뒤를 몇 발자국 따라가서 골목길에서 다시 말씀 드렸어. “‘늦가을 강변에 서서수필집, 너무 고맙고요…… 이삼 일 이내로 낮에 전화 주세요. 알았죠?” 하니까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갔지.

이게 어제 늦은 밤부터 오늘 새벽 한 시경에 걸쳐서 있었던 일이야. 정말 한 편의 드라마 같지 않니? 그래서 다른 때 같았으면 낮 열두 시는 되어야 잠에서 깨는데 오늘은 열한 시경에 일어났다니까. 세수와 기초화장까지는 해놓고 기다려야 되지 않겠니? 그래야 그분이 전화를 주는 대로 늦지 않게 나갈 수 있잖아.

그런데 지금이 오후 세시이니까…… 오늘은 전화 없이 그냥 지나간 거겠지?

내 짐작에는 그분이 어제, 오늘 새벽까지 술 마시며 다니느라 고단해서 늦게 일어나셨을 것 같아. 그러니 전화할 새가 있었겠니? 이런 정도의 추리는 기본이지. 그분이…… 내일 낮에 전화하실 거야. 틀림없어. 내가 그분과 만나고 난 뒤에, 나중에 너한테 얘기해 줄게.

, 나쁜 년 아니지? 나는 그분을 좋아하지만 우리 남편도 사랑해. 이제야 하는 얘기인데 먼젓번 산재병원에 갔을 때 우리 남편이 이러더라고. “나는 당신이 다른 좋은 남자가 있으면 연애도 하고 그랬으면…… 내 마음이 편하겠어.”

내가 남편한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더 말을 못하게 했지만…… 그래그래, 고마워. 역시 너는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친구야. 너도 우리 남편과 같은 마음이구나. 고마워. 이만 전화 끊을게.

내일이나 모레쯤 무슨 일 있고서, 그 때 다시 전화할게. 하하하하. 알았어. 그래그래, 하하하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