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일 없었니?

먼저 통화하고 열흘만이지? 바쁜 일들이 있어서 너한테 전화 한 번 못하고 지냈네. 남편 있는 산재병원도 다녀오고 서류도 떼어다 주고 그러느라 좀 바빴어.

그분 얘기부터 시작할 게. 그분이 자기가 뭐하다가 퇴직했는지 퀴즈로 낸다 했잖아? 알아냈어. 그분은 바로 일 년 전에 여기서 가까운 시골의 군청에서 과장으로 있다가 퇴직한 분이시더라고. 문화관광과라고 갖가지 문화행사를 주관하는 부서의 장이셨다는구나. 그분이 내게 말해 준 것은 아니고 우연히 다른 손님한테서 얘기 들었지.

그러니까 지난 주 일요일이었어. 그날 초저녁부터, 등산 다녀온 분들이 한꺼번에 여남은 명 들어찼는데 그분이 공교롭게 그 직후에 나타난 게 아니겠니? 일주일 만이었지. 그분은 잠깐 들어왔다가는 실내가 떠들썩하니까 그냥 휭 나가시더라고. 나는 얼마나 속상하던지 쫓아나가서 선생님, 이따가 다시 들르세요.”하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고개를 그냥 끄덕끄덕 하며 가시는 게 다시 들를 것 같지 않더라니까. 얼마나 속상하니, 하필 기다리던 그분이 오기 직전에 무더기로 손님들이 닥칠 게 뭐니? 매상도 좋지만 이럴 때는 속상하단다.

맞아 맞아, 그 날이야. 내가 일손 좀 도와 달라고 너한테 전화 건 그 날이야. 네가 남편이랑 속초에서 광어회를 먹고 오는 중이라 했지. 그래서 하는 수없이 이웃 식당 집 아주머니 일손을 빌려서 손님들 접대를 치렀다니까. 아주머니한테 돈 만원을 나중에 드렸지 뭐. 그런데 그 손님들 중 한 분이 내게 이러시는 거야. “아까 들어왔다 그냥 나가신 분, 여기 잘 오세요?” 그래서 내가 네에, 우리 집 단골입니다.”했더니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야. “그분이 ○○군청에서 문화관광과 과장님으로 퇴직한 분이지요. 내가 십여 년 전에 상사로 모시기도 했는데 오늘 얼결에 인사도 못 드렸네. 그분이 글 쓰는 게 취미라 수필집도 한 번 냈어요.”

나는 그 말씀에 얼마나 가슴이 벅찬 줄 몰라. 내가 그분 정체에 대해 반은 맞춘 게 아니겠니? 국문과 교수는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수필집을 낸 분이라니…… 대학 교수와 뭐가 다르겠니? 내가 누구니? 여고 시절에 글짓기 백일장만 나가면 상을 타던 애가 내가 아니었니? 여류작가가 되는 게 그 때 내 꿈이었다고.

어쩜, 글 잘 쓰는 분을 이렇게 만날 줄이야!

역시 뭔가 다른 분이었어. 내가 왜 진작부터 그런 괜찮은 분이 우리 가게를 들르는데도 모르고 있었지?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까 그럴 이유가 있었어. 다른 손님들과는 합석하면서 신상을 알게 되는데 그분과는 합석이 그 날 처음이었거든. 합석이란 게, 내가 청하는 게 아니라 손님들이 청해야 가능한 일이잖아. 그러니 항상 혼자 말없이 맥주를 마시다가 가는 그분이…… 어려워서 어디 내가 말이나 붙일 수 있었겠니?

그런데 그 날 새벽 이후로 그분과 합석하게 되면서…… 알면 알수록 아주 괜찮은 분인 거야. 무뚝뚝해 보이지만 마음속도 따듯하고, 역시 글 쓰는 분이니까 뭐가 달라도 달랐어. 우리 여자들이 사내들은 다 똑같이 도둑놈들이라고 말하지만……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분은 달라. 정말 점잖고 좋고 괜찮은 분이야. ? 잠깐 기다리라고? 알았어, 년아.

그래…… 무슨 일이야? 강아지가 거실바닥에 오줌을? 니미, 개 팔자도 좋네. 삼십 평 넘는 아파트에 사람과 같이 살면서 아무 데다 오줌 싸고 먹고 자고…… 나보다 낫네. 정말 개 팔자 상팔자네.

, 그분 이야기를 마저 할게. 시끄러워! 너는 그냥 듣기만 해. 내가 수다 떠는 일 외에 무슨 낙이 있니, 년아. 하하하하.

그분 이야기나 조금 더 하고 오늘 전화 끊을 게.

그분이 그렇게 단체 손님들로 떠들썩하니까 휭 하니 가시고 난 그 이튿날 초저녁에 다시 우리 가게에 오셨다는 게 아니니? 내가 안의 전등들을 켠 뒤 바깥의 간판 불을 켜는데 그분이 들어오셨다니까. 항상 당신이 즐겨 앉는 창가 테이블 자리에 앉더니 마담, 음악 틀어줘요. 그리고 생맥주 오백하고 마른안주…… 그리고 복분자주도 한 병.” 하시는 게 아니겠니?

그래서 그분이랑 호젓하게 마주앉아 술잔을 나누었다는 게 아니니?

우리 가게가 외진 데 있어서 초저녁에는 손님들이 거의 없거든. 대개 시내에서 일차로 술 한 잔 마시고 귀갓길에 들르는 늦은 손님들이 많지. 그러니까, 잔잔한 팝송 씨디를 골라서 틀어놓고 나는 그분과 호젓하게 마주앉아 술잔을 나누었단다. 네가 알지만 나는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시집갔잖아? 이 장사를 한 뒤로 남자들이 단골손님이랍시고 접근들 많이 했지만 다 그게 그거야. 빤한 늑대속셈이 아니겠니? 자기 마누라 아닌 다른 여자 맛 좀 보자는 게 아니겠니? 내가 손님 자리에 합석을 잘하긴 해도 항상 조심한다니까. 이 좁은 바닥에 외간남자와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하니? 손님들 떨어져 나가는 게 문제 아니지, 머지않아 시집 장가보낼 내 새끼들 앞날까지 먹칠할 일이지.

가만 있자, 그분 얘기를 한다는 게 심각한 얘기로 들어섰네. 그 날 그분 얘기로 다시 돌아갈게.

내가 그분한테 말씀 드렸지. “이렇게 초저녁에 들르시면 대개 손님들도 없고 조용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시간대에 자주 와 주세요.” 그러니까 그분이 이러시더라고. “내가 겉보기보다는 몸이 안 좋아요. 환갑 다 된 노인네니까 당뇨니 고혈압이니 해서 몸이 시원치 않아서…… 그래서 이 집을 자주 오고 싶어도 그러지를 못 하는 거요. 의사가 술은 절대 금하라지만 노후에 술도 못하면 무슨 낙으로 사나? 그래서 도수가 약한 생맥주를 마시는 거지.”

자주 오실 것 같았는데도 그러지 않은 이유를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어. 나는 그분께 그 퀴즈 얘기를 꺼냈단다. “선생님, 먼젓번에 내신 퀴즈의 정답을 제가 알 것 같거든요? 맞추면 점심 한 번 사신다 했지요?”하니까 그분이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선생님은 ○○군청 문화관광과 과장님을 하시다가 나온 분이잖아요? 수필가이시고. 맞죠?” 하니까 그분이 껄껄 웃으면서 하여튼 이 도시가 좁아. 금세 알아냈네! ……그래, 마담한테 점심 한 번 내야지. 그럼 말이야, 마담 휴대폰 번호 좀 가르쳐 줘요. 내가 적당한 날 낮에 연락할 테니까.” 하시더라고. 그래서 내 번호를 가르쳐 드리고 제가 오전 중에는 잠을 자고 낮 열두 시경에 일어나니까 그걸 참조해서 연락 주세요. 그리고 오실 때, 선생님의 수필집도 남은 게 있으면 한 권 부탁합니다.” 말씀드렸지. 그분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어.

이렇게 내가 손님과 점심식사 약속하는 것은 드문 일이란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그쯤 될 거야. 아무 손님하고나 그런 약속 하면 안 되거든. 인구 이십만은 넘는 도시라지만 얼마나 좁은 바닥이게? 그래서 나는…… 쉽게 점심약속을 잡지 않고 몇 달을 끌면서 그 손님이 어떠한 인간인지 잘 살펴보고서 약속에 응한다니까. 솔직히 여자 손님이 나한테 식사를 사겠니? 남자손님이니까 나한테 식사를 사는 거지. 그러니까 조심해서 응해야 하거든. 대개는 별 일 없이 식사나 하고 말지만 안 좋은 작자들도 있지.

예를 들어 작년의 어떤 사장님은 아주 점잖게 우리 가게를 다니면서 나를 잘 대해주다가, 내가 믿고 점심약속을 했더니 어떻게 나온 줄 아니? 중형차 큰 것을 몰고 나와 드라이브부터 하자며 외곽으로 나가더니 글쎄, 모텔 주차장으로 불쑥 들어가더라니까? 내가 어이가 없어서 아니 점심식사라더니 왜 이러시는 거에요?”했더니 뭐라 그러는 줄 알아? “방에 들어가서 식사를 부탁해도 다 갖다 줍니다. 걱정 마세요.”하는 것 있지? 미친놈의 새끼지! 내가 그냥 차에서 내려 도로로 뛰쳐나왔지 뭐니. 그 새끼가 아무리 힘센 놈이면 뭣하니? 벌건 대낮에 길바닥에서 나를 붙잡아 갈 수는 없잖아? 거기서 택시를 휴대폰으로 불러서 타고 왔지 뭐야. 괜히 점심도 굶고 비싼 택시비만 쓰고 말았지. 그 실없는 사장 새끼가 나를 매춘부로 보고 있었던 모양이야. 나 참!

아냐, 수필가인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니야.

내가 그분과 술잔을 나눈 지는 채 한 달도 안 되지만 나는 알아. 다른 남자였으면, 내가 각별히 대해준다는 느낌 하나만으로도 벌써 뻔질나게 우리 가게를 들르면서 수작을 건넸을 텐데 그분은 전혀 그런 기미도 없었잖아? 그 뒤로 기껏 세 번 들렀던가? 정말 보기 드문 점잖은 양반이야.

뭐라고 년아? 노인네니까 그 생각이 감퇴한 거라고? 이 년도 참, 그렇지 않아! 그분은 동안이라니까. 연세는 환갑 근처이지만 몸은 우리 또래야. 나도 참,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좋아. 네년 말대로 노인네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점잖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어떠냐? 나는 그런 푸근한 분 품에 그냥 한 번 안겨보고 싶어. ‘그거없이도 그냥 안겨서 잠이라도 푸근하게 자고 싶어. 그래그래, 농담이 아니야.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십년이나 부부생활도 못하고 사니? 여자 나이 사십대 말 오십대 초가 한창 부부 맛을 아는 나이라는데 나는 뭐니?

나는 이제는 지쳤단다. 남편 복이야 날아갔다 치고 애들 바라며 사는데 애들이야 얼마 안 있으면 다 제짝 찾아서 떠날 것 아니니? 그럼 내 인생은 뭐니?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이 나이에 밤잠 한 번 제 때 자지 못하고 밤샘 장사니?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해야 하니?

…… 미안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

다시 전화할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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