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일 없었니? 내가 날마다 전화하는 셈이네? 그럼, 그분 얘기를 하고 싶어서 전화 걸었어. , 궁금하지 않았다고? 시끄러워, 년아! 하하하하.

자 그럼, 얘기 들어. 너는 힘들 것 없어. 어제처럼 그냥 듣기만 하면 돼.

내가 …… 다른 날들보다 한 시간은 이르게 가게 문을 열고서 기다리는데 그분이 오지를 않더라고. 그런데 앞마당 비로 쓸자 문둥이가 온다고…… 그 망할 자식이 일찍이도 들어와서 소주 한 잔을 시켜놓고 앉아 있으니 얼마나 내 마음이 편치 않던지! 눈치를 보니까 그 자식이 뒤늦게 정말 그 여자, 남편이었나?’ 수상하단 생각에 확인 차 온 모양이야. 자기가 알기에는 분명 남편이 산재병원에 십 년째 누워 있다는데 그렇게 꼭두새벽에 남편이란 사람이 멀쩡하게 와 있다니, 아무래도 미심쩍다는 생각이 든 게지.

덜 낸 돈 육천 원부터 달라고 싶어도 일단 참고서, 그 자식이 주문한 소주와 노가리를 준비해 갖다 주고 주방에 있었지. 그러다가 시간이 웬만큼 지나서 손님들이 들어올 때부터는 주방을 나가 주문도 받고 합석도 해 주고 하면서…… 그 자식 있는 구석 쪽으로 가는 일은 피했지. 벌레 같은 자식이라 내쫓고 싶지만 여기가 서비스업이니까 어떡하니? 그냥 냅둬야지.

그런데 그분은 오시지 않는 거야. 그 자식은 소주 한 병 갖고 두 시간 넘게 미적거리면서 나를 살펴보는데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친정의 오라비라도 불러서 그 자식을 해결하고 싶은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이냐? 친정에 근심거리 하나 덧붙이는 일밖에 더 되겠니? 문둥이 같은 자식은 오늘도 자정 넘어서까지 남아서 무언가 짓거리를 할 눈치이고…… 그래서 고민하면서 장사를 하는데 그분이 나타났단다!

얼마나 반가운지 냉동 오징어들을 가스 불에 녹이다가 그만 태울 뻔했단다, . 그러니까 밤 아홉 시가 될 즈음에 그분이 물방울무늬 티셔츠 차림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거, 있지. 나는 얼른 주방을 나가서, 창가 테이블의 의자를 잡아 조금 뒤로 빼주어 그분이 편히 앉도록 한 뒤에 말을 건넸지. “선생님, 뭐 좋아하세요?” 물었더니 늘 하던 대로 생맥주 오백하고 마른안주 줘요.”하는 거야. 내가 더 비싼 것을 시키셔도 됩니다. 제가 내는 거니까요.” 했더니 허허 웃으면서 그럼, 마담이 좋아하는 복분자주 한 병을 추가합니다.” 하더라니까. 그분이 내가 좋아하는 술도 알고 계신 거야.

나는 가슴이 콩닥거리면서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더라니까. 아마 실내 불빛이 밝았다면 그런 내 얼굴빛이 보였을 텐데 어둡기 다행이었지. 뭐라고?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얘는…… 내가 팔자가 꼬여서 이리 됐지만 이래봬도 여고 시절에는 문예반을 했었잖니?

맞다, 맞아. 그분은 국문학과 교수일 거야. 점잖은데다가 희끗희끗한 머리, 생각 깊어 보이는 얼굴…… 틀림없어, 내가 이 장사 칠 년 동안 통달한 것 중 하나가 손님들 직업 맞추기라니까.

나는 주방에서 마른안주와 술을 준비해서 그분 자리에 가서 합석했단다. 구석에 앉은 그 개자식이 연실 가자미 눈깔이 되어서 그분과 나를 째려보더구먼.

얘도, 고만 웃어라 얘.

그분이 복분자주 병마개를 따더니 내게 한 잔 따라주어서 나는 그분의 맥주잔과 보조를 맞추면서 마셨지. 다른 손님들의 추가 주문을 받거나 나가는 손님들의 계산을 받을 때 이외에는 그분 자리에 합석해서 술잔을 나누었단다. 어쩜 그분은 음악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은지! ‘호텔 캘리포니아가 나오니까 이건 몽롱한 대마초를 피우는 그런 세기말적 분위기의 노래인데하면서 그에 얽힌 뒷얘기라든가, ‘디 엔 오브 더 월드가 나오니까 마담, 이 노래 부르는 스키드 데이비스가 지금 할머니가 되었다는 것 아시나?”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적이 있다는 등…… 웬만한 라디오의 음악전문 디제이 못지않으시더라고.

처음으로 합석해 본 셈인데 얼마나 구수하고 박식하게 말씀을 잘 하시는지!

사실, 내가 특정 손님과 오래 합석하는 것은 그리 좋은 게 아니거든. 다른 손님들한테 소홀히 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고…… 다른 생맥주집에 갈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내가 보고 싶어서 들른다는 손님들이 삐쳐서 다른 데로 갈 수도 있거든.

얘는, 뭔 소리니? 난 아직도 예쁘다는 말을 듣잖니? 우리 가게가 외진 데 있어도 손님들이 찾아오시는 이유를 너는 모르니? 내가 오십 나이인데도 다들 사십대 초 중반으로 보고 있다니까. 물론 화장발 덕을 단단히 보긴 하지만 말이다. 하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그분이 말씀도 잘하시지만 얼굴도 동안이더라고. 나는 그분이 그 새벽에 늙어서 새벽잠이 짧아진다.’는 얘기를 할 때에는 이분이 무슨 소리를 하나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정년퇴직한 분이더라고. 공직생활을 하다가 막 퇴직하셨다는 거야. 그러니까 환갑이 다 된 분이지. 그런데도 어쩜 오십대 중반이나, 우리 또래처럼 보이냐? 가까이서 뵈니까 얼굴에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게 전혀 환갑 나이가 아닌 거야. 이런 분이 우리 가게를 전부터 간간이 들렀는데도 내가 어떻게 제대로 알아 뵙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까 싶더라니까.

그분이 나는 생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게 취미인데 이렇게 예쁜 마담도 알게 되었으니 이 집의 단골이 되겠다.”고 하시는 것 있지? 그러니 앞으로는 자주 들를 거야. 그래그래, 그분이 들를 때 곧바로 너한테 전화할 게. 그 때 와 봐. 그분이 어떻게 생긴 분인지 너한테 보여주고 싶구나.

내가 그분한테 혹시 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있다가 퇴직하지 않으셨어요?”하고 물었더니 허허 웃으면서 그건 아닙니다. 거기는 환갑이 넘어 예순다섯이 정년이거든요. 나는…… 가만 있자, 이 문제는 퀴즈로 두겠소. 마담이 내가 뭐하다 나온 사람인지 맞추면 상으로 점심 한 번 내리라.”하는 거였지. 어쩜 목소리도 그윽하고 잔잔한지.

그러고 있으니까 그 개자식이 영 수상하다는 눈길로 우리 쪽을 째려보며 앉아 있더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무래도 부부로 보이지 않았겠지. 어디 부부가 그렇게 매너를 갖추고 마주앉아서 술잔을 나누니? 그러니까 그 자식이 저건 아무래도 수상하다. 부부는 아니다. 그럼 무슨 관계일까?’ 생각했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든든한 백 하나가 생긴 셈이므로 그 자식을 눈앞에서 내쫓아야겠다는 마음까지 들더라니까. 그깟 자식 하나 안 온다고 매상이 줄면 얼마나 줄겠냐? 그래서 그분께 생맥주 한 잔을 추가로 갖다드리려고 일어난 김에 그 자식한테 가서 말했지. “어제 육천 원을, 마저 주셔야죠.”

그랬더니 그 자식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거, 있지? 내가 그깟 자식이 겁날 게 뭐가 있니, 든든한 그분도 가까이 앉아 있는데…… 그분이 덩치도 좋아서 작은 그 자식 덩치의 두 배는 돼 보이거든.

그 자식이 이러더라고. “이따 나갈 때 주면 안 되나?” 그래서 지금 주세요.” 했더니 그 자식이 나 참!” 하며 일어나면서 어제 남긴 돈 육천 원과 오늘 계산 만 이천 원을 합쳐서 만 팔천 원을 테이블 위에 팽개치듯 탁 놓고서 문 밖으로 나가 버렸어. 꼬리를 밑으로 감은 똥개 모양, 꺼지던 꼴이라니! 하하하하.

그분과 나는 자정 가까이 술잔을 나누었단다. 나는 복분자주를 두 병이나 마셔서 좀 취했는데 그분은 기껏 생맥주 오백을 세 잔 마셨는데도 취하신 것 같더라고. 내가 더 드시겠어요?” 물었더니 아니, 됐어요. 나는 많이 못합니다. 이만 가야죠.” 하시는 거야. 그러면서 어쩐 줄 아니? 글쎄, 지갑을 꺼내 계산하시려는 거야. 내가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내는 겁니다.” 해도 다음에 마담이 내세요.” 하면서 굳이 만 원 짜리 네 장을 주시는 거 있지. 나는 하는 수없이 오천 원을 거슬러서 그분한테 드렸어. 복분자주까지 삼만 오천 원이 나왔거든. 그런데 그분은 됐습니다.” 하면서 잔돈도 받지 않으시니…… 얼마나 넉넉하고 좋은 분이니!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아마 내가 취해서 힘든 내 팔자 사연을 털어놓았나 봐. 그분이 그런 나한테 술값 부담은커녕 몇 푼이라도 남겨주고 싶었던 게 아니겠어? 얼마나 마음씨 좋은 분이니!

나는 그분이 문 밖으로 나갈 때 뒤따라 나가서 배웅까지 했단다. 그분은 내가 따라 나왔는지도 모르고 그냥 걸어가다가 선생님 또 오세요.”하는 내 인사말을 뒤로 듣고는 놀라서 뒤돌아보더라고. 그럴 때는 어쩜 청소년 같던지.

잠깐, 밖에 누가 왔나 보네. 뭐요? …… 아파트 노인회? 아예, 폐휴지 받으러 오셨구나. 잠깐만요. 얘야. 오늘 전화는 여기까지 할게. 그럼 끊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