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차는 마침내 운포면 희망리 마을로 가는 도로로 들어섰다. 방금 전 운포면 면소재지 동네 가까이 다다랐지만 외곽도로로 그냥 지나쳐 온 거다.

자갈 많고 먼지 나던 신작로가 아닌 깨끗한 아스팔트길이다. 그런데 다른 차들도 없이 한적한 길이라 그는 차의 속도를 시속 40키로 정도로 낮추었다.

웬 사내의 멱살을 쥐고 , 이 새끼야! , 춘천에서 온 봉길이 알아?’하고는 냅다 발로 후려차기를 했던 고개가…… 없어진 듯싶다. 고백하건대 달빛에 드러난, 놀란 사내의 얼굴은 최소한 30대는 돼 보였다. 나이도 열 살 이상 될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이다.

운이 좋았다. 만일 사내가 면소재지 파출소로 달려가 춘천에서 온 봉길이란 깡패한테 봉변을 당했다고 신고했더라면 어찌 될 뻔했나? 하마터면, 다음 날 저녁쯤 외갓집에 나타난 경찰관에 체포되어 충주나 청주 같은 대도시의 경찰서로 이송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건 사내가 하마터먼 맞아죽을 뻔했는데 운 좋게 살았다!’며 안도의 숨이나 쉬고 만 덕분이 아닐까?

그리고, 코피가 터진 것은 둘째 치고 앞니가 몇 대 나갔을 키 작은 아이.

다행히 그 아이도 사나이끼리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끝까지 애써 담대한 자세를 유지한 게 아니었을까?

운포면 내에는 마땅한 치과도 없었을 테니 하는 수 없이 충주나 청주의 치과를 다니면서 의치를 해 넣느라 고생이 많았을 게다. 요즈음같이 인정 삭막한 시대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키 작은 아이의 담대함이었다. 그 아이한테 지금이라도 고마워해야 한다.

그의 차가 어느 새 희망리 앞에 다다랐다. ‘희망리란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가 동네 어귀에 서 있다. 그 바위가 아니더라도 버스 정류장 역할 하던 도로 변 구멍가게집이 허름하나마 남아 있어서 희망리 어귀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에 동네 통 털어서 하나뿐이던 그 가게가 이제는 널빤지 여러 장으로 전면을 폐쇄해 버린 폐가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바위 옆에 차를 세웠다.

, 그 날 밤 사건의 현장은 언제 지나쳤을까? 험한 신작로 대신 말끔한 아스팔트길로, 차로 5분여 만에 도착하는 바람에 그날 밤 사건의 현장을 휙 지나치고 만 것 같다. 우선은 외갓집부터 가 보고, 다시 돌아갈 때 사건 현장을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 예전의 굽이 많던 신작로를 바로 펴면서 아스팔트길로 만들어 놓아, 과연 그 현장을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동네 안 길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놀랍게도 예전의 즐비했던 집들이 대부분 사라진 풍경이다. 새마을운동으로 철거됐을 그 많던 초가집들은 그렇다 치고 몇 안 되던 기와집마저 빈 터로 남았거나 농촌주택이라는 표준형 단층 건물로 변해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사람이 사는 주택보다 조립식 창고나 비닐하우스가 더 많아 보이는 동네다.

농촌 사람들 대부분 도시로 나가면서 농촌이 황폐화된다는 뉴스 보도를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듯한데, 45년 전 사건 다음 날새벽에 마지막으로 본 정겹던 풍경이 이렇게 황폐화되었을 줄이야.

45년 전 새벽이다. 그는 책가방 짐을 싼 뒤 외할머니를 찾았다. 외할머니는 새벽부터 부엌 바닥에 앉아 옥수수 껍질들을 벗기고 있었다.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하나 남은 외동아들 용석 아재를 충주의 모 고등학교에 유학까지 보낸 정성은 그렇듯 항시 변함이 없었다.

할머니, 나 춘천 가야 해, 차비 좀 줘.”

갑작스레 나타난 외손주에 놀란 외할머니. 주름살 가득한 얼굴로 옥수수 껍질 벗기기도 멈추고, 그냥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개학하자마자 학교에서 시험을 본다는데 그걸 깜빡 잊었어. 어서 집에 가서 공부해야 돼.”

외할머니는 허리를 천천히 펴며 일어나더니 당신의 허리춤에서 비닐로 돌돌 싼 작은 돈뭉치를 꺼냈다.

차비 하고…… 남은 거는 니 에미한테 줘라. 아니 그런데 손이 왜 퉁퉁 부었냐?”

어제 벌에 쏘였어.”

그럼 된장이라도 발라야제.”

괜찮아. 가다 약방 들를게.”

그는 그 길로 외갓집을 나왔다. 먼동이 트는 새벽에 동네 안 길이 아닌, 뒷동산 오솔길로 해서 동네를 떠났다. 외할머니 말고는 아무도 그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전 날 밤 저지른 일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게 전개될 듯싶은 불길한 예감에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그렇듯 춘천으로 새벽같이 달아나는 방법을 택했다. 개학은 아직도 열흘이나 남았다. 뒷동산을 넘을 때 그는 왠지 외갓집에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잠깐 멈춰 서서 외갓집을 비롯한 희망리 온 동네를 돌아보았다.

‘“꼬끼요오!”

닭울음소리들이 여기저기 나며, 굴뚝들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밥 짓는 연기들. 초가집들 사이로 드문드문 기와집이 있는 그 평온한 풍경.

그의 황급한 처지와 비교되던 평온한 풍경이라니…….

그 후 그는 왠지 외갓집에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장장 45년간이나 발길을 끊었다.

이듬해는 고 3이 되면서 대입예비고사 공부를 하느라 바빴고, 그 이듬해에는 학비가 저렴한 사범대학에 들어가 미팅하고 데이트하고 실연도 하고 그러느라 경황이 없었다. 그러면서 외갓집은 추억 혹은 기억 속의 무엇이 되었다.

솔직히 마음만 먹었다면 외갓집에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한테 주먹을 맞고서 앞니들이 다 나간, 망신창이가 된 키 작은 아이가 마음에 걸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뒤늦게 그 날 밤 사건을 문제 삼을 것 같은 두려움이랄까.

그는 낡은 기억을 뒤지듯, 동네 골목을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골목이라면 동네 안을 이리저리 통하는 길을 뜻하는데 동네가 황폐화된 지금 골목이란 표현이 합당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 때 휴대폰이 부으응!’ 울었다. 아내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차에쥐색빛깔지갑있나확인바람

쥐색빛깔지갑이라면 아내가 성당 갈 때마다 지참하는 돈지갑이다. 그걸 차 안 어디에 둔 모양이다.

이런 칠칠치 못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백 날 콩나물 값 몇 푼을 깎으면 뭐해? 돈지갑도 잊고 다니면서……!’ 속으로 발칵 욕하던 그는 돌연 발걸음을 돌렸다. 조금만 골목을 더 걸으면 외갓집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할 수 있지만 그건 지금 중요치 않다. ‘희망리바위 있는 데로 황급히 걷는데, 조수석 창이 고장 나서 반쯤 열어둔 차 생각이 퍼뜩 났기 때문이다. 인적도 그친 동네처럼 보이지만, 모르는 일이다. 누군가 조수석 창 안으로 손을 넣어 차 문을 연 뒤, 돈지갑을 갖고 갈 수 있다.

황급히 뛰어갔더니, 늦가을 햇살 아래 차는 그대로 있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움직임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불편한 차 실내에서 몸을 사방으로 움직여가며 쥐색빛깔 지갑을 찾았다. 없었다. 글러브 박스는 물론이고, 의자 뒤의 주머니 닮은 부분의 속과 의자 밑까지 샅샅이 살폈으나 그 지갑을 찾을 수 없었다.

모자란 여편네 같으니라고. 대체 어디다 흘린 거야.’

마지막으로 트렁크를 뒤져볼 생각에 차 밖으로 나왔는데 그 때 조수석 쪽의 창유리가 푸르륵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졌다. 반 정도 열려 있던 게 이제는 활짝 열린 꼴이다. 장만한 지 10년 넘었음을 어김없이 증명하는 고물차다.

이제 어떻게 한다? 이대로 400리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그랬다가는 꼴불견도 그렇지만, 차 안으로 들이치는 쌀쌀한 바람을 세 시간이나 감당해야 한다. 그건 못할 짓이다. 천생, 카센터라도 찾아, 어서 해결하자. 그러려면 면소재지로 가 볼 수밖에.’

그는 아까 오던 아스팔트길로 부지런히 차를 몰았다. 45년 전 그날 밤 사건의 현장이고 뭐고 차창 고장을 수리하는 일이 급하다.

면소재지 동네에 도착했다. 희망리와는 다르게 제법 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선 장거리. 약국, 다방, 당구장, 철물점, 농협 하나로마트, 우체국…… 인적은 뜸하지만 있어야 할 건물들이 작은 규모로 존재하고 있다. 마침내 우정 카센터란 간판의 조립식 건물을 만났다.

차를 건물 앞에 세우자 키 작은, 때에 전 가죽점퍼 차림의 사내가 안쪽의 작은 사무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나 참! 조수석 창유리가 내려가서는 안 올라오거든요.”

고치는 데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오늘 중으로야 수리되겠죠?”

그 말에 사내가 입을 벌리고 헤헤 웃는데 앞니 모두가 누런 금니였다. 작은 키에 앞니를 다 간 사내……. 그는 억지로 따라 웃으며 등허리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 때 성가시게도 휴대폰이 또 부응울었다. 아내가 다시 보낸 문자메시지.

찬미예수님지갑주방에서찾았어미안해당신지금어딨어?’

이럴 때 답신이 가능할까?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다는 이상한 답신이 아내에게 가능할까? 그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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