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문학회’ 활동사> -4
이병욱은 전상국 선생님과 춘고 동기이기도 한 이승훈 시인을 만난 적도 있었다. 그 때의 이야기를 옮긴다.
『보리수 다방에 가면 운명 교향곡 같은 클래식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창가에 앉아 책을 보거나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이승훈 시인(2018년 별세)’을 뵐 수도 있었다. 그분은 춘천 교대 교수였다. 1970년 어느 날 나는 창가의 그분께 용기를 내 합석을 요청했다. 강원대 국어과를 다니는 학생이라고 나 자신을 밝힌 뒤 ‘문학작품 속에서의 현실과 실제 현실이 다른 데 따른 갈등’을 말씀 드리고 해답을 부탁드렸다.
도대체 말이 되는 질문을 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인데다가, 초면의 다른 대학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이승훈 시인은 아주 따듯하게 해답을 말씀해 주었다. ‘그런 갈등 자체를 작품으로 다뤄보며 스스로 해답을 찾아보라’는 말씀이었던 것 같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다방을 나왔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보리수 다방 창가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거나 독서를 하던 그분의 모습이 생생하다. 현대인의 불안이나 소외를 다룬 난해한 시들을 발표하던 시적 경향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던 따듯한 말씀이라니.』
- ‘무심이병욱의문학산책’에서 발췌
한편 바로 그 해 여름방학 때 이병욱은 강원대학의 교지 ‘설악’ 창간호 발간을 맡아 조양기업사(출판사)에 출입하면서 타 대학의 교지를 참고하다가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웃한 춘천교대의 교지 ‘석우’에 실린 한 소설의 작가 이름이 ‘이도행(李道行)’이었던 것. 처음 보는 이름이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 교지 발간 일을 맡은 같은 국어과 여학생한테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한다.
“이도행이라니 참 이름도 특이하네.”
『그러자 그녀가 불쑥 말했다.
“이도행이란 사람을 내가 아는데 우리보다 5년 위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말을 이었다.
“우리 언니가 이도행 씨와 동급생이라서 잘 아는데 ‘성질 고약하다!’고 그러더라고요.”
뭔가 재미난 사연이 있어 보여서 이어지는 얘기를 기대했는데 그녀는 다시 침묵하다가 불쑥 이런 말로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하기사, 소설 쓰는 사람들은 괴팍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
-‘무심이병욱의문학산책’에서 발췌
그 ‘이도행’ 작가를 반세기 지난 2019년 3월에 김유정 문학촌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내게 춘고 5년 선배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버지 살아생전에 가장 아끼던 후배였던 것. 그런 사실까지 알게 된 사건이 몇 달 지난 2019년 7월에, 서울에서 2호선 전철을 함께 타고 가다가 있었다.
『전철 좌석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춘천의 ‘김유정 문인비’ 얘기에 이르렀는데 이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그 비(碑)가, 내가 잘 알던 선배님이 세운 비이거든.”
그 말에 놀란 내가 대꾸했다.
“그 비는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가 세웠는데?”
“뭐라고? 그럼 자네 선친 함자가?”
내 입에서 선친 이름이 나오자 이 선배가 놀라서 내 손을 쥐고는 더 이상 말을 못했다. ‘절그덕 절그덕’ 전철 가는 소리만 존재했다. 이 선배가 이윽고 감회에 젖어 말했다.
“자네가 그 선배님 아들이었다니!… 나를 얼마나 귀여워하고 대견해하셨는지 몰라. 막걸리 집에서 많은 얘기를 하시곤 했지. 당시 춘천의 몇 안 되는 낭만파 예술인이셨다고. … 1969년에 내가 군대 갔다가 제대하면서 춘천에 돌아왔지만 집안이 그 사이에 서울로 이사 간 바람에 따라가느라고 미처 못 뵙고 헤어진 건데… 그 후 세월이 흘러 선배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문만 듣게 돼… 유족이라도 만났으면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 나중에 자세한 얘기를 듣겠네.”
전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왔다. 따가운 햇살이 이 선배와 나를 맞았다. 재경동창회 사무실을 찾아 앞서 걸어가는 이 선배를 뒤따르면서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겼다. ‘소설(픽션)이 현실을 못 따라가는구나. 소설은 현실을 가공해서 나오는 거라고 말들 하는데… 이렇게 현실이 소설을 압도할 줄이야.’』
-‘무심이병욱의문학산책’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