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문학회’ 활동사> -3

6,70년대 춘천지역의 문인들과 인연을 맺는 과정에서 이병욱은 전상국 선생님(소설가)도 만나게 된다. 다소 길지만 그 때 이야기를 옮긴다.

 

1966년 봄날에 춘천에서 1회 개나리 문화제가 열렸다. 행사의 일환으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백일장이 열렸고 뜻하지 않게 나는 시() 장원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뜻하지 않게라는 표현을 쓴 건, 영문도 모르고 백일장에 참가한 때문이다.

당시 나는 춘천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는데 학급담임선생님이 수업은 걱정하지 말고 글짓기 대회에 다녀와라.”고 갑자기 외출(?)시킴으로써 얼결에 이뤄진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장원으로 뽑힌 내 시의 제목을 기억한다. ‘산길이었다.

난생처음으로 국어사전까지 부상으로 받는 영광의 날, 며칠 후 아주 젊은 선생님이 나를 찾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3학년 국어를 맡은 선생님이라 했다. 3학년이 8개 반이나 돼 국어 선생님 두 분이 4개 반씩 맡아 가르쳤는데 다른 반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네가 이번에 시에서 장원한 이병욱이냐?”

.”

가만 있자, 병욱이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냐?”

아버지 성함을 말씀 드리자 선생님은 !’ 하면서 어떤 감회에 젖어 말을 못했다. (왜서 그랬는지는 이 글의 후미에 밝힌다.) 잠시 후 선생님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병욱이가 시 공부를 하면 좋은 시인이 될 것 같구나. 내가 아는 시인이 한 분 있는데, 네 시 공부를 부탁해 놓을 테니까 앞으로 토요일 오후에는 학교에 남아야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무실을 나왔다.

토요일 오후가 됐다.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깜빡 잊은 척하고 귀가해 버렸다.

아마 선생님이 우리 반 국어를 가르치는 분이었다면 당장 그 다음 주 월요일 수업시간에 나를 보는 대로 야단을 쳤을 게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한테 국어를 배우는 학생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말았는데 어쩌면 이런 맹랑한 녀석은 일찌감치 포기해버리자며 알아서 단념해버렸을지도 몰랐다.

사실 내가 감히 선생님의 호의를 외면한 건 학교에서 수업이 끝난 뒤에 따로 남아 하는 특별활동에 마음의 상처가 깊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년 간 그림 잘 그리는 어린이로서 매일같이 학교에 남아 미술반 활동을 했던 고된 경험이 그것이다. 여하튼 그 바람에 선생님과 소중한 인연이 시작될 뻔했다가 사라졌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 선생님이 전상국 선생님이라는 사실. 그 때 내가 말씀대로 토요일 오후에 따로 남아시 공부를 했더라면 일찍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 ‘무심이병욱의문학산책에서 발췌

 

내가 춘중 3학년 학생일 때 우리 아버지 성함을 물어서, 말씀 드렸더니 전상국 선생님이 어떤 감회에 젖어 말을 못하던 까닭이 반세기 지나 밝혀졌다. 2019년 정초에 사석에서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였다.

이병욱 작가의 아버님이, 내가 춘고 학생일 때 강원일보 현상문예 심사를 맡으셨는데 내 소설을 당선작으로 정하셨지. 그 때의 당선으로 내가 소설 쓰는 일에 자신이 생기면서 나중에 소설가가 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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