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 장례식장에는 많은 분들이 왔다. 조문을 하고 식당으로 안내됐다. 그 자리에서 같은 춘천의 노화남 선배를 뵈었고 이어서 지면으로나 알던 한수산 작가를, 이 선배가 나서서 인사소개 시켜주었다.
장례식장 식당은 조문객들이 여기저기 모여앉아 이런저런 얘기로 밤새우기 마련이다. 나는 이런 기회에 이 선배와 아버지 얘기를 많이 나눌 생각을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선배가 모처럼 만난 동기 분들과 2차로 어디를 갈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회자가 된 선배 분을 뵈러 양구에 다녀오기로’ 했던 것 같다.
이 선배와 얘기도 제대로 못 나눈 채 또다시 헤어진 셈이 됐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보름 후인 11월 23일에 내가 수원에 가기 때문이다. 좀체 여행 다니는 일이 없는 내가 그 먼 수원까지 가게 된 건 ‘수원 사는 조카네 둘째아들 돌잔치’ 때문이다. 다른 조카도 아니고 ‘두꺼비 조카’(‘두꺼비’라는 제목의 수필까지 썼을 정도로 나는 그 조카를 아낀다)가 초대했는데 안 갈 수는 없었다.
다음은 이 선배한테 한 카톡이다.
나: 제 조카가 수원에 사는데 23일에 둘째아들 돌잔치를 한답니다. 선배님도 뵐 겸해서 그 날 수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낮 12시에 돌잔치 한다 했으니 잔치 끝나고 오후 늦게 선배님을 뵙지 않나 싶네요.
11월 23일이 되었다. 아내와 새벽부터 움직여 청춘선 기차를 타고 일단 서울로 가는데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있었다. 철도노조의 총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 바람에 아내와 나는 수원에 도착해서 낮 12시의 두꺼비네 돌잔치에 참석하고는 이내 귀갓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수원⇒서울⇒춘천의 귀갓길인데 수원에서 서울로 가는 전철 노선이 따로 있지 않았다. 두세 번은 환승해야 했다. 파업으로 전철 운행이 감축되어 매 칸마다 승객들이 미어졌다. 그 바람에 아내와 나는 환승을 잘못해서 한 시간 가까이 지하공간에서 헤맸다. 그 때 이 선배가 카톡을 보내왔다. 이 선배는 본시 평안북도 벽동 사람이다. 급할 때는 평안도 사투리가 카톡에 실린다.
이도행 선배 : 歸春 중이오? 그대 내외 만나면 수원행궁 행궁동 주마간산하고 예약해둔 밥집에서 저녁식사 하잤는데 철도 파업 땀시 약속 어그러져 심히 유감이오.
나: 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청량리에서 기차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도행 선배 : 오후 4시 용산으로 간다더니?
나 : 중간에 열차 환승이 잘못돼서 그리 됐습니다. 대처승이 열차 파업까지 만나 혼란의 극치입니다!
대처승이란 표현 때문에 이 선배가 파안대소할 것 같았다. 대처승. 나한테 아내가 어느 날 쏘아붙인 말에 등장했던 단어다.
“교직에 있을 때도 남들은 다하는 승진에도 무관심하고… 도대체 책 보고 글이나 끄적끄적 쓰는 것 외에 하는 게 뭐 있어? 그러려면 혼자 산에 들어가 살든지 해야 하는데, 결혼해서 처자는 있고! 그러니까 당신은 스님으로 치면 대처승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