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이 선배한테 직접 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선배님의 작품 중 ‘무채도’는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거든요. 동기인 한수산 씨의 ‘부초’나, 이외수 씨의 ‘꿈꾸는 식물’과 견줘도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빛을 보지 못했습니까?”
이 선배가 착잡한 표정으로 답했다.
“운이 없는 게지….”
모름지기 작가는 작품으로 자신을 보이는 것이다. 만일 서로의 작품 수준이 실망스러웠다면 이 선배와 나 사이의 친분은 생겨나지 않았을 게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이 선배의 뛰어난 작품들이 제 빛을 보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고, 이 선배 또한 같은 생각에서일까 내게 발표지면을 소개해 주고 싶은 후배로 여겼다.
그 결과 열흘쯤 지난 7월 2일, 우리는 서울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부근에서 정각 10시에 만났다. 지상으로 나와 부근에 있는 모 문예잡지사의 주간을 만나 뵈었고, 이어서 2차로 ‘재경춘고동창회’ 사무실로 가려고 다시 지하로 내려가 전철을 탔다. 재경춘고동창회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쟁쟁한 동문들의 연락처나 다름없는 곳이다.
전철 좌석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춘천의 ‘김유정 문인비’ 얘기에 이르렀는데 이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그 비(碑)가, 내가 잘 알던 선배님이 세운 비이거든.”
그 말에 놀란 내가 대꾸했다.
“그 비는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가 세웠는데?”
“뭐라고? 그럼 자네 선친 함자가?”
내 입에서 선친 이름이 나오자 이 선배가 놀라서 내 손을 쥐고는 더 이상 말을 못했다. ‘절그덕 절그덕’ 전철 가는 소리만 존재했다. 이 선배가 이윽고 감회에 젖어 말했다.
“자네가 그 선배님 아들이었다니!… 나를 얼마나 귀여워하고 대견해하셨는지 몰라. 막걸리 집에서 많은 얘기를 하시곤 했지. 당시 춘천의 몇 안 되는 낭만파 예술인이셨다고. … 1969년에 내가 군대 갔다가 제대하면서 춘천에 돌아왔지만 집안이 그 사이에 서울로 이사 간 바람에 따라가느라고 미처 못 뵙고 헤어진 건데… 그 후 세월이 흘러 선배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문만 듣게 돼… 유족이라도 만났으면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 나중에 자세한 얘기를 듣겠네.”
전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왔다. 따가운 햇살이 이 선배와 나를 맞았다. 재경동창회 사무실을 찾아 앞서 걸어가는 이 선배를 뒤따르면서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겼다. ‘소설(픽션)이 현실을 못 따라가는구나. 소설은 현실을 가공해서 나오는 거라고 말들 하는데… 이렇게 현실이 소설을 압도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