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 시인을 따라 인파를 10여 미터 헤치며 가자, 둥근 베레모를 쓴 분이 벤치에 앉은 채로 반가워했다. 내 작품집 ‘K의 고개’를 들어 보이며.
“여기 오기 전에 ‘봉의산 가는 길’ 카페에 들렀더니 자네 책이 있더라고. 그래서 한 권 샀지. 사인해 줘.”
나는 감격해서 책 속표지에 사인해 주는 손이 다 떨렸다. 책이 안 팔리는 시대라, 특히 소설책은 한 권 팔리기도 어렵다는데 선배 소설가 이도행 씨가 사 주었다니!
“감사합니다.”
“우리 같이, 사진도 찍자고.”
하면서 악수한 채로 옆의 아내 분한테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줄 것을 바랐다. 자세를 조금씩 바꿔가면서 사진을 세 장인가 찍고는 서로의 스마트폰 번호도 교환했다.
“이렇게 만나는 줄 알았으면 내 책을 갖고 와서 자네한테 선사할걸 그랬어. 오늘은 수원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나중에 책을 선사하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내가 소설 쓰고 싶은 갈망에 교직을 명퇴하고서 집필 생활에 들어간 지 10여 년. 지면으로나 알았던 이도행 선배작가도 직접 뵙게 되는 등, 비로소 나 자신 작가가 되었구나! 실감이 난 하루였다.
이도행 작가가 젊은 시절 춘천에서 살 때 매우 가깝게 지낸 선배 연극인이 있었는데 바로 그분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일 줄이야… . 놀랍고 기가 막히는 인연을 깨닫기는 그 세 달 뒤다.
3월 29일 김유정 문학촌에서 보고 한 달 남짓 지난 5월 초순 나는 전화를 받았다. 이도행 작가였다.
“내 생일이 5월에 있잖소. 나는 생일을 집에서 지내지 않고 친구들과 기념 여행을 하는 것으로 한다오. 이 작가, 혹시 이번 내 여행을 같이할 생각 없어요? 내 학창시절부터 절친인 최종남 작가가 차 운전을 맡았는데.”
그 즈음 나는 장편소설 집필에 여념이 없었다. 2016년 7월에 첫 단편소설집 ‘숨죽이는 갈대밭’을 낸 데 이어 2018년 12월 중단편소설집 ‘K의 고개’까지 책 두 권을 냈으나… ‘모름지기 장편소설 한 권을 내야 진정한 소설가다’라는 스스로의 사명감을 어쩌지 못해 채 한 달도 쉬지 못하고 다시 집필에 전념하던 차였다. 그렇기에 ‘선후배 소설가들이 함께하는 모처럼의 여행’ 제의를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도 하고 내 성격이 원래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궁벽한 면모가 있음을 이제 고백한다. ‘여행은, 멀쩡한 집을 놔두고 괜히 밖에 나가서 자는 고생’이라는 생각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한다.
“선배님. 제가 바쁜 사정이 있어서 여행에 참여 못하고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실 때 미리 문자를 주세요. 이번 기회에 선배 작가님들한테 간단하나마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알았네. 그럼 내가 잘 가는 후평동의 연당막국수라고, 막국수 맛있게 잘하는 집인데 그 집에서 만나는 거로 하지. 날짜는 …”
나중에 알았는데 연당막국수는 구한말 일제치하에서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이규완’의 후손들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참고:
작가 이도행(1946~ ) :강원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오산'(1969)/ 중편소설 '풀꽃 목숨 하나'(1987) '고모부'/ 장편소설 '잊으려는 순간에서 잊는 순간까지'(문예촌),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잿빛 기억'(정암문화사), '문밖의 문'(유정출판),
'흔적'(문학과 현실), '맞선'(무궁화),'태풍의눈'(대현문화), '봄내춘천옛사랑'(한결), '봄내춘천그리움'(한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