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모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일이다. 한 학생을 반 친구들이 이름 대신 에어(air)’라고 부르기에 기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봤다. 그랬더니 이렇게들 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것이다.

쟤가 수시로 방구를 뀐다니까요.”

당사자에게는 미안한 얘기이지만 얼마나 재기 넘치는 별명인가. 친구가 방귀 뀌는 것을, 자동차 바퀴가 바람이 빠지는 현상에 빗댄 그 놀라운 언어감각.

그런 빛나는(?) 언어감각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춘기 때 즉 중고등학교 시절에나 가능할 듯싶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다.

같은 반에날그니라 불리는 아이가 있었다. 분명낡은이를 연음(連音)해 부르는 별명인데 암만 봐도 노인네처럼 생기지 않아 의아했다.

어쨌든 기발한 별명이었다. 늙은이도 아닌 낡은이라니. 늙다와 낡다는 사실 출발이 같은 말들이다. ‘오래되어 후줄근하게 된 모습을 뜻하는 어근ᄂᆞᆰ에서 분화되어 음성모음 쪽은 사람에게, 양성모음 쪽은 물건에게 쓰이게 된 거다. 이런 현상을 모음교체라 한다. ‘작다 적다’, ‘ ’, ‘마리 머리 등이 모음교체의 예다.

나는 날그니라 불리는 친구한테 한 번 다가가서애들이 왜 너를 날그니라고 부르니?’묻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졸업했다. 별명 같은 민감한 부분을 물어봐도 될 만큼 친한 사이가 못됐기 때문이다. 졸업 후에도 동창들 사이에서 그 친구는 항상 이름 대신 날그니란 별명으로 불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50년 세월이 흘렀다.

며칠 전 나는 마침내 날그니 친구한테 그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 친구와 함께 새 아파트로 가던 늦은 밤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 그에 앞서 어떻게 내가 날그니 친구와 가까워졌는지 밝혀두어야 한다. 4년 전 내가 첫 작품집 숨죽이는 갈대밭을 낸 뒤 모교 운동장에서 동문 친선 체육대회가 있었다. 그 날 날그니 친구가 나를 보더니 이러던 것이다.

네가 책을 냈다는 소식에, 내가 서점에 가서 한 권 샀단다.”

그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잊지 않고 있다가 얼마 전 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을 때 내 두 번째 작품집 ‘K의 고개를 한 권 선물했다. 그 바람에 가까운 사이가 된 거다.

 

나도 참 못 말리는 놈이다. 50년 지나 늦은 밤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닷없이 날그니 친구한테 이렇게 물었으니.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왜 친구들이 너를 날그니라고 부르니?”

그러자 날그니 친구가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은, 늘 자기 별명을 해명하고 싶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게 말이다, 우리 동창 중에 안○○가 있잖니? 그 녀석이, 내가 학창시절에 늘 낡은 군화를 신고 다니는 걸 보고 별명 붙인 거야.”

그 간단한 해명이라니. 어쨌든 나는 50년 만에 궁금한 것 한 가지를 풀었다.

 

날그니.

얼마나 부르기 편하고 재밌는 별명인가. 날그니 친구가 학창시절에는 어떤 기분이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노후에 접어들었으니 정말 명실상부한 날그니가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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