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 그분



 

처음에 그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취만 남겼다

우리 내외가 땀 흘려 일군 고구마 밭을한꺼번에 폭탄 맞은 듯한 쑥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짓으로 첫 선을 보인 것이다. 처음 겪는 일이라 누구 짓인지 몰라 인근에서 농사짓는 분한테 그 요절난 고구마 밭을 보였더니 이렇게 말씀했다.

멧돼지 짓이네. 그러잖아도 이 지역은 산골짜기라 산짐승들이 자주 내려온다고 알려드리려 했는데. 우리처럼 상주하면서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면 고구마 농사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아요. 산짐승들도 사람들이 고구마를 맛있어 하면 똑같이 맛있어 하니까 말입니다. 수박 참외 같은 농사를 이 동네에서 엄두내지 못하는 게 그 때문이죠.”

그럼 여기서는 뭘 농사지어야 합니까?”

옥수수 농사가 무난하죠. 그놈들이 옥수수를 따다 쪄 먹을 것도 아니니 밭의 옥수수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내외는 이듬해 봄, 밭에다 옥수수 모종을 사다 심었다. 고추도 겸해서 심었다. 그랬더니 밭에 별일 없이 그 해가 갔다. 다시 해가 바뀌어 2014년 가을 어느 날이다. 아내와 함께 우리 밭 바로 아래 집에 들러 동네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밖에서 누군가 소리 질렀다.

멧돼지다!”

얘기 나누다 말고 뛰쳐나와 그 쪽을 봤더니 우리 밭 가까운 산 쪽으로 뒤뚱거리며 달아나는그분이 보였다. 50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엉덩이만 보이는지라 그 모습을 제대로 본 것은 못됐다. 하지만 멧돼지인 게 분명했다. 흑갈색 털빛이며 돼지 특유의 뒤뚱거리는 걸음이며.

그분은 우리 밭에 먹을 작물이 없나 해서 옥수수 밭에 접근했다가 동네 사람이 소리치자 기겁해 달아난 것이다.

가슴이 벌벌 떨린다는 아내 옆에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아서 산으로 달아나다니, 그럼 자기가 잘못했다는 도덕적 관념이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도덕적 관념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강한 자(사람)와 맞닥뜨렸다는 두려움에 달아난 거겠지.’

여하튼 결론은 그렇게 내렸지만 그분의 뒤뚱거리며 산속으로 피하는 모습 자체는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뒤 달아나는 행동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구체적으로는불륜을 저지르다가 발각돼 급히 뒤뚱거리며 달아나는 중년 사내같았다.

산짐승임에도 내가그분이라 부르게 된 까닭이다.

 

그 후 몇 년 간 그분은 우리 밭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밭 부근에 살면서 농사짓는 게 아니라, 시내에 살면서 바람이라도 쐬고 싶을 때 차를 몰고 와서 농사짓는 거라 사실 밭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서히 그분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올 가을 들어 그분, 아니 그분들이 큰 문제를 일으킬 줄이야! 밭에 들어와 작물을 휘젓고 달아난 정도가 아니다. 아프리카 돼지 열병이라는, 바이러스 성 전염병의 매체로서 국내 양돈계를 위협하는 악역(惡役)으로서다.

그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그분들을 말살하는 정책이 펼쳐지고 있다. TV 뉴스 시간마다 산과 들, 심지어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엽사들에게 사살된 그분들 사진이 뜨는 판이다. 농가에 피해를 주는 정도로 인식되던 그분들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느닷없이 몰살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추운 겨울이 바짝 다가왔다. 그러잖아도 겨울만 되면 산에서 먹이가 떨어져 인가로 내려오다가 포획되곤 하는 그분들인데이런 범정부적인 조치에 과연 한 마리라도 살아날지 의문이다. 몇 년 전 우리 밭을 방문했다가 달아난그분도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될 것 같다. 이미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이 산하의 야생동물 중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그분들이라는데 그분들의 씨를 이렇게 말려도 괜찮은 걸까? 생태계가 무너지면서 아프리카 돼지 열병 이상의 큰 혼란이 닥치게 되는 건 아닐까? 이른 봄부터 시작한 장편집필도 웬만큼 된 데다가, 올해 농사까지 끝나 한가해져서인지 나는 별 걱정을 다하며 이 겨울을 맞고 있다.


www.kimyouje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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