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카한테‘두꺼비’란 별명을 붙인 건 거의 자연발생적이었다.
1984년 1월, 그 두 달 전에 태어났다는 조카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두꺼비다!”하고 외쳤으니 말이다. 그럴 만했다. 갓난아기치고는 우람한 몸매에 넓적한 얼굴이 딱 두꺼비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아우(두꺼비 아비가 되고 만 사람)도 그렇고 제수도 그렇고 모두 함께 와하하 웃고 말았다. 큰아버지(나)란 사람이 학창시절부터 문학에 뜻을 두어 눈에 보이는 사물을 평범히 표현하지 않는 버릇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두꺼비.
이 땅의 전설에서 두꺼비는 항상 영물(靈物)이었다. 악의 기운을 물리치는, 묵직한 존재. 독사가 개구리는 잡아먹어도 두꺼비는 멀리한다지 않던가. 간혹 눈치 없는 독사가 두꺼비를 개구리인 줄 착각하고 잡아먹었다가는 얼마 못가 ‘뱃속에 든 두꺼비가 내뿜는 독’에 죽어버리고 만다 했다. 그 죽어 자빠진 독사의 허물을 벗어내며 두꺼비가 어그적어그적 밖으로 나타난다 했던가.
지난 11월 23일 수원에 사는 두꺼비 조카가 둘째아들 돌잔치에, 우리 내외를 초대했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란 말이 있더니 과연 그 말처럼 잇달아 아들만 둘을 낳은 두꺼비 조카. 그 날, 여기 춘천에서 수원까지 전철로 가는데 하필 철도 파업에다가 대입 보는 수험생들로, 가는 길이 여간 힘겨웠던 게 아니다. 그래도 수원의 이름있는 한정식 식당에서 두꺼비 조카와 아내, 그 어린 아들들을 봤을 때 힘겨움이 순간 싹 사라져버렸다.
몇 년 전에 두꺼비 조카를 만났을 때 내가 이리 물었다.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냐?”
그러자 이리 답했다.
“두꺼비집에서요.”
집의 전원을 올리고내리고 하는 장치가 두꺼비집인데 그것을 재치 있게 써먹던 것이다.
아이들을 낳지 않아 지금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판이다. 이럴 때 잇달아 떡두꺼비 같은 아들들을 낳은 두꺼비 조카. 애국까지 하는 모습에 나는 큰아버지로서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