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 있었다.

 

싸롱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처럼 돼 버리는 탓에, 여자애들은 대개 고개 숙인 모습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일제히 몰리는 시선들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다만 얼굴이 아주 예쁘게 생긴 경우에는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나 보란 듯이 똑바로 쳐들고 들어오기도 했다. 물론 극히 드문 경우였다.

그런데 그 여자애는 달랐다. 누가 봐도 아주 예쁘게 생긴 얼굴인데 늘 고개 숙이며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벽 옆의 빈자리를 찾아 앉은 뒤 시집(詩集)을 한 권 테이블 위에 펴 놓고 보는 모습이었다. 어둑한 실내라 벽 곳곳에 작은 전등이 설치돼 있는데 그 빛을 이용하는 것이다. 긴 머리를 정갈하게 늘어뜨리고서 시 감상에 몰두하고 있으니 지하공간의 그 누구도 말을 붙이기 힘들었다. 차 주문을 받는 종업원마저 말을 붙이지 않는다면 여자애는 아마 100% 미동도 않는 자세였을 게다.

그 여자애는 종업원한테 주문을 말하는 대신 종이쪽지에 써서 건넸다, 항상 블랙커피 한 잔에 신청 음악은 린 앤더슨의‘Rose Garden’였다. 경쾌한 리듬으로 시작되는 그 음악이 나오면 미처 그 여자애의 등장을 몰랐던 애들까지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예쁜 그 여자애가 어디 앉았나?’둘러보았다.

싸롱에 들어오는 여자애들은 대개 둘이나 셋씩이었는데 그 여자애는 늘 혼자 들어와 시집을 보았다.

내 친구 녀석이 가만있기 힘들었다. 음악 감상은 핑계이고걸 헌팅할 속셈으로 아폴로 싸롱에 오는 녀석이라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접근조차 허용치 않는 것 같은 그 여자애의 고고한 분위기에, 한 달 넘게 망설이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었다. 싸롱 오기 전 나하고 운교동 동부시장 대폿집에서 막걸리 한 잔 걸친 덕이 아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겠다. 녀석은 여자애의 한 마디 말에 두 손 들었다.

모처럼 용기를 내 그 여자애한테 다가가 말을 붙이는 것 같더니 얼마 안 돼 뒤통수를 긁으며 돌아온 녀석이 내게 털어놓은 사태의 전말이다.

내가 공손하게 말을 건넸어. ‘잠깐만 대화 좀 나눌 수 없을까요?’그러자 여자애가 고개도 들지 않고 작은 소리로 이러는 거야. ‘저는 지금 책을 보고 있거든요.’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않으니 내가 두 손 들고 돌아올 수밖에.”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녀석의 낭패를 위로해주었지만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음악 소리가 요란한 곳에서 시들을 감상하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혹시 연출이 아닐까? 자신은 외모도 아름답지만 내면의 미()도 갖췄다고 과시하고 싶어서 말이다.’

 

내 젊은 날에 친구 녀석과 예쁜 여자애와,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이 수필에 나오는 아폴로 싸롱은 70년대 춘천 시내 한복판에 있었던 음악다방의 이름입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서 종일 팝송과 송창식 같은 우리나라 젊은 가수들의 노래를 감상했습니다. 흡연은 허락됐지만 음주는 허락되지 않았던 나름의 멋진 음악 감상실이었습니다. ‘싸롱’이란 이름 때문에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 오해 살 수 있어서 뒤늦게 무심이 밝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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