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이 여러 번 오가며 대화가 무르익었다. 얼굴이 많이 밝아진 외수형이 내게 물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어봤습니까?”

서울 1964년 겨울로 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난김승옥작가를 모른다면 소설 쓰는 사람이 못된다. 더구나무진기행이라니. (정훈희가 안개를 불러 데뷔하자마자 톱가수가 됐는데 그 노래는 같은 이름의 영화 주제가이며 그 영화의 원작이무진기행이다.) 내가 무진기행을 읽어본 감동을 말하자 형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누추하지만 제 자취방으로 가서 더 얘기 나눕시다.”

형을 따라나섰다. 2차선 찻길을 건너 시내버스 정류장 판이 서 있는 부근 구멍가게 앞에 형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내게 말했다.

이 가게에서 마음껏 먹고 마실 것을 고르시오. 내 가게나 마찬가지이니까.”

솔직히 마음껏 고르기에는 가게가 너무 작아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초면인 처지에 형의 후의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뭐했다. 나는 소주 두 병과 통조림을 집어 들었다. 형이 돈 계산도 않고 가게를 떠나는 것을 보니 외상장부를 만들어놓고 지내는 게 분명했다.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강둑 가까운 곳에 형의 자취방이 있었다. 정말 누추한 방이었다. 5평이 채 안 되는 방에 그림과 화구(畵具)들이 가득했다. 내 지금 기억에 형은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색 바지 차림이었다. 페인트가 와이셔츠와 바지 가득하게 묻어 있어서 얼핏 보면 얼룩덜룩한 무늬의 옷차림 같았다.

예술이란 것은

소주 한 잔을 권하면서 형이 특유의 담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좁은 방에 형의 교대 후배들이 하나 둘 들어와 앉았다. 형은 담론을 펼치다가 문득 나한테 이형은 어떻게 생각하우?’묻기도 했다. 내 의견을 들은 뒤 담론 일부를 수정하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화제를 바꿔 자신이군대 가서 유격훈련 받던 일을 재미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좁은 방안에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가 형은 다시 붓을 들어 캔버스의 미완성된 그림에 매달렸다. 얼마간 방안에 침묵만이 있었다. 웬만큼 그림이 마무리되자 붓을 내려놓고는 다시 다른 담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인생이란 것은

그러면서 날이 밝았다. 그 자유분방함, 남다른 예술가적 모습에 나는 석사동을 찾아온 본래 목적을 잊어버렸다. 일주일이나 그 좁은 방에서담론을 듣다가 군대에서 벌어진 일 얘기 듣다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다가, 그러다가 문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다가하며 지냈다.

 

고향도 다르고 성장과정도 다르고 어디 그뿐인가. 동년배도 아닌 외수형한테 내가 단번에 빠져든 사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돌이켜보면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 한 때 예술가의 표상 같았던 학천이가 허망하게 스러지자 그 빈자리에 외수형이 홀연 들어선 거라는. 더구나 형은 미술은 물론이고 문학까지 능통한 존재였다. 교대 후배들이 매일같이 그 좁고 누추한 방에 찾아오는 것만 봐도 단순히군대 갔다 온 나이 많은 복학생이 아니었다.

뜻밖에 형과 내가 급격히 친해지자 학천이는 정말 곤혹스런 입장이 되었다. 비유하자면 원수를 처치하려고 자객을 보냈는데 엉뚱하게도 그 자객이 원수와 친해진 경우라 할까. 학천이는 기댈 사람 하나 없는 고립무원 처지가 되자 모든 걸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생각을 바꿨다. ‘차라리, 내가 알아서 병욱이를 찾아가 매를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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