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실 위에 미술실이 있었다. 태원이를 따라 미술실에 들어간 나는 추상화 한 점과 마주했다.
“이 그림이야.”
태원이의 말에 우선 그림 감상에 들어갔다. 구체적인 사물을 그린 게 아닌 추상화라서 감상은 물론 제목 붙이기도 쉽지 않았다. 어쨌든 10여분쯤 감상한 뒤 그에게 말했다.
“‘가을의 끝’이 어때?”
태원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의 끝’ 그림은 그 해 ‘강원미술대전’에서 종합대상이라는 큰 영광을 태원이한테 안겨주었다. 그런 대단한 소식조차 한참 후에 알게 될 정도로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종일 수업에다가 야간자율학습 감독까지. 게다가‘춘고 60년사’ 집필까지 책임졌으니… 한창 젊은 30대였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과로사 했을 게다.
‘가을의 끝’
그림 사진을 지금 보면 당시 나의 고단한 삶이 떠오른다. 고단한 삶 저편에 어린 공허감마저 비친다. 특히 그림의 반 이상을 차지한, 무채색에 가깝게 처리한 가운데 부분. 가을의 특권인‘결실’도 맺지 못하고 그대로 추운 겨울을 맞는 심정의 허탈함이 여실하게 나타나 있는 듯싶다. 태원이가 80년대 초 인물화에 집착하다가 벗어나기 시작한 시점의 한복판에‘가을의 끝’그림이 등장한 게 아닐까.
국어교사와 미술교사로서 모교에서 만났다는, 뜻 깊은 기간을 그렇듯‘한 점 추상화에 제목을 붙여준 일’한 가지 이외에는 생각나는 일이 없이 그냥 보냈다는 기막힘. 나의 무심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오직 학력제고 한 가지 목표로 휘몰아치던 삭막한 학교 분위기가 분명 한 역할 했다.
내가 모교에서 저 먼 영월고등학교로 떠난 때가 89년 2월. 그 후 5년 동안 서로를 못 봤다가 2004년 3월에 다시 고향 춘천에서 재회했다. 이번에는 모교가 아닌 다른 학교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