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85년 그해 전태원이 춘천에서 처음 개최되는‘66회 전국체전의 카드섹션 도안과 연출의 총책임을 맡아 도교육청 별관으로 출근하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인사 발령은 춘고로 났지만 막상 근무는 딴 데에서 한 것이다. 태원이는 당시를 이렇게 술회했다.

별관에 출근해서 꼬박 1년간 카드섹션 밑그림을 수십 장 그리고 나니 시력이 급속하게 나빠졌지. 그 때부터 내가 안경을 쓰게 된 거야. 그 무리한 행사 준비 또한 전두환 정권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겠어?”

전국체전이 끝나고서야 태원이는 모교로 출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88년까지, 우리는 3년여를 함께 근무했음에도 딱히 좋은 추억 하나 만들지 못했다. 정말 안타깝다. 굳이 까닭을 댄다면 지난 60년대와 너무도 다르게 바뀐 모교 분위기가 있다. 80년대의 모교는 학력제고밖에 모르는 입시학원 같은 분위기였다. 미술을 가르치는 태원이는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나는주요과목 국영수중 국어를 맡았다는 죄로 종일 수업하느라 도통 겨를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밤에는 담임한 반 학생들의 야간자율학습도 감독해야 했다.

839월에 결혼한 나는 가장이 돼 집안까지 이끌어가느라 정신 하나 없이 바빴다. 이런 일화가 있다. 83년 그 해 11월 초순의 어느 날이다. 그 날은 모처럼 야간자율학습 감독이 아니어서 저녁 시간에 퇴근했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후평동 2단지 주공아파트로 귀가를 서두르다가 문득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야아. 내가 결혼했구나! 집에 가면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결혼한 지 50여 일만에 결혼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니, 그런 희극이 어디 있을까. 여하튼 기분이 몹시 좋아진 나는 가까이 있는 가게에 들어가 알록달록한 사탕 봉지 하나를 샀다. 17평 아파트의 주방에서, 모처럼 일찍 귀가한 남편을 위해 저녁 밥상을 준비하는 아내한테 그 사탕봉지를 건넸다. 아내가 영문을 몰라 했다. 내가 말했다.

이거 선물이야.”

10여 년 뒤 아내가 그 날의 일을 얘기하며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내게 뭘 선물하기는 그 날이 처음이야. 당신은 정말 무심한 사람이야.”

 

모교의 정신없이 바쁜 교사생활.

그런 중에 딱 한 번 태원이와 내가 만났다. 물론 한 학교에서 근무하니 복도나 교무실 같은 데에서 수시로 만났겠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만남이 아니라 스쳐지나감이었다. ‘별 일 없어?’ ‘그럼. 자네는?’ ‘별 일 없지.’하는 정도의 대화나 나누는. 당시 교사들은 물론이고 학생들까지 숨이 콱 막히게 휘몰아치던 학력제고의 현장, 모교. 사실 그런 비교육적인 현상은 춘고만이 아니었다. 전도(全道)적이었다. 몇 년 뒤인 1989년경 참교육을 부르짖는 교사들의 전교조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태원이가 모처럼 만난 내게 진지한 낯으로 말했다.

내가 그림을 한 점 그렸는데, 그 그림 제목을 붙여줄 수 없나?”

87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전태원 화백의 ‘The Wave 시작도 끝도 없는‘ (2018.09.04. ~09.16.) 전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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