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의 오페라
밀턴 브레너 지음, 김대웅 옮김 / 아침이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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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지금은 '객석'의 표지모델이 될 정도로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가 된 여인을 사귄 적이 있었다. 오페라에 별 취미가 없었지만 그녀가 나오는 오페라들을 할 수 없이, 애인된 자의 의무로 봐야 했는데, 나중에 그녀와 헤어졌을 때 이런 말로 날 위로했다. '잘한 거야. 안그러면 평생 오페라 볼 뻔 했잖아'

오페라는 고급예술이라는 생각에 지레 포기해서인지, 난 오페라를 보는 내내 뭐가 뭔지 머리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예컨대 '라 트라비아타(춘희)'는 두 번이나 쫓아가서 봤지만, 줄거리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그녀와 헤어진 후 오페라를 보러 간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밀턴 브레너라는 오페라 비평가가 지은 <무대 뒤의 오페라>는 나도 몰랐던,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오페라에 대한 갈망을 불러 일으켰다. 뒷얘기는 대충 다 재미있지만, 유명 오페라에 얽힌 이러저러한 얘기들을 담은 이 책은 오페라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데, 각 오페라의 줄거리를 요약해 놓은 게 특히나 재미있었다. 그 줄거리들을 보니 '이걸 미리 알았다면 나도 재미있게 오페라를 볼 수 있었을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당장 오페라를 보러 예술의 전당을 찾을 것 같지는 않지만, 기회가 되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는 되었다. 특히나 '사랑의 묘약'이 공연된다면, 가고 싶어질 것 같다.

글 중에는 저널리즘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는 대목이 있다. 나도 들은 적이 있는 비제의 '카르멘'에 대해 당시의 비평가들은 엄청난 혹평을 해댔다. 차이코프스키는 너무도 감동받아 ''카르멘'이 오페라 중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등 음악가들은 한결같이 찬사를 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비제는 실패의 쓰라림을 안고 초연으로부터 3개월 후 36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는데, '비평가들도 나중에는 그의 오페라가 걸작임을 인정했지만...자신들의 성급한 혹평에 대해서 사죄나 해명도 하지 않고 그저 모른 척했다' 물론 혹평을 해서 비제가 죽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살아생전 찬사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은 역시 비극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저널리즘은 당시 파리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까?

딱딱한 글만 쓰는 비평가답지 않게 작가의 글은 촌철살인의 유머가 번뜩인다. [...람세스 3세는 ...적들을 무찔렀다. 후세의 사람들이 그의 찬란한 승리를 잊어버렸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그의 책임이 아닐텐데, 그는 이런 불상사를 대비해 나일 강 연안에 웅장한 신전을 건립하고 위대한 전쟁의 장면들을 회화와 조각의 형태로 남겨두었다 (181쪽)] 나처럼 오페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사람이 본다면 오페라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게 될 것임을 확신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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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4-03-03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그녀와 헤어졌을 때 이런 말로 날 위로했다. '잘한 거야. 안그러면 평생 오페라 볼 뻔 했잖아'............글쎄요....계속 교제를 했다면......오페라에 관한 책을 한권 쓰셨을지도??....^^

마태우스 2004-03-06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랬을지도 모르죠^^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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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의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을 읽으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게 아니라, 우려먹는 재주가 대단하다는 거다. 그녀가 쓴 책 중에는 자신의 과거를 담고 있는 게 몇권 되는데, <두려움과 떨림>은 자신이 일본 회사에서 근무하던 경험을, <사랑의 파괴>는 중국에서 보낸 유년기의 경험을, 그리고 이번 책은 그녀가 태어나서 세 살 때까지의 얘기를 그리고 있다. 내 과거를 아무리 뒤져봐도 책한권이 나오기 힘든 판인데, 외교관 아버지를 두긴 했지만 나보다 삶의 경험이 적은 노통이 자신의 과거를 여러 권의 책으로 만드는 걸 보면,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끌어내는 게 바로 유명작가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 의하면 노통은 어릴 적, 공주병에 빠져 있었나보다. [내가 없었을 때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슬펐을까(76쪽)....누군들 이런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우선 충직한 신도들에게 감상의 기회를 주었다. 탐이 날 만큼 아름다운 나비처럼 빙글빙글 돌면서...(80쪽)....막달라 마리아가 에수의 무릎으로 와락 달려들어 긴 머리를 발에 비비는 모습이 좋았다. 누가 나한테도 그렇게 해줬으면 했다 (122쪽)] 지금도 미인 축에 들지만, 공주 같은 외모로 미루어 볼 때 어릴 적의 노통은 더 이뻤을 것 같다. 아기 때 이쁘지 않은 사람은 없다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그렇지 못했다. 식탁 옆에 걸려있는 내 100일 사진은 아무리 봐도 한숨만 나온다(그때에 비하면 지금이 오히려 나을 정도다). 세 살 때 이미 대부분의 말을 깨우쳤다는 그녀의 주장도 지금 노통이 보여주고 있는 천재성을 감안하면 사실로 느껴진다.

숨막히는 일본 사회의 관료주의를 비판한 <두려움과 떨림>에서도 그랬지만, 노통은 일본 사회에 대해 확실히 적의를 품고 있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자신이 바다에 빠졌을 때, 일본 사람들은 모두 수수방관했다고 한다. [누구든 절대로 목숨은 구해주지 않는다는 일본의 오랜 전통에 충실한 나머지, 가만히 서서 나를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86쪽)...목숨을 구해주면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상대방을 속박하는 것이다 (82쪽)]

설마, 정말로 그럴까 싶다. 하지만 몇 년 전 다른 일본인을 구하려다 전차에 치어 죽은 이수현 씨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보였던 찬사를 생각해 볼 때, 남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그 나라에서는 그다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게 노통의 말대로 '상대방을 속박'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 목숨을 아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남자를 잉어에 비교하는 등 그녀의 책마다 나오는 남자혐오증을 이 책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하여간 책이 매우 발랄하고 깜찍해, 지루한 책을 읽다가 머리를 식힐 목적으로 읽기에는 적당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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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동창들과 오대산에 다녀왔다. 이 나이에도 친구들과 그렇게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내가 너무 행복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멤버; 여행을 간 멤버는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유부녀, 이혼녀, 이혼남, 독신남에, 이혼을 앞두고 있는 친구-얘는 요즘 걸핏하면 나한테 술마시자고 전화를 건다-임신한 아내와 싸우고 집을 뛰쳐나온 친구, 그야말로 드림팀 아닌가? 남편을 버리고 여행을 온 유부녀가 준재벌에다 뻑하면 "오늘은 내가 쏠께!"라고 외치던 애였고, 또한 알아주는 미식가였던 덕분에, 편하고 즐겁고 맛있는 이틀을 보낼 수 있었다.

갈 때; 내 특기는 수다다. 차를 타고 있는 동안 난 쉴새없이 수다를 떨었는데, 이따금씩 대화에 참여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수다를 떠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피곤하단다. 어쨌든 그 수다 덕분에 차들이 꽉 밀린 머나먼 길을 즐겁게 갈 수 있었다. 허물없는 친구들이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편했다.

1차: 감자전, 닭도리탕, 만두국을 안주로 각자 취향에 따라 술을 마셨다. 나와 친구1, 친구2는 소주를, 여인1은 백세주를 마셨고, 친구3은 유부녀가 가져온 '설화'-정종이란다-를 두병이나 마셨다. 소주 4병을 셋이서 나눠 먹었으니, 내가 마신 건 한병이 조금 넘을게다. 손님이 다 없어지자 우린 구석에 놓여 있던 기타를 집어들고 노래를 불렀다. 취미로 그룹활동도 하고있는 친구3이 기타를 쳤으며, 80년대 학번답게 이문세, 비틀즈, 최호섭-세월이 가면-동물원, 김현식, 유제하의 노래들을 불렀다. 나보다 노래 가사를 더 많이 아는 애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2차: 유부녀가 가져온 양주를 놓고 숙소에 모여앉았다. 너무 혹사했는지 내 몸이 술을 잘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마셨다. 술이 약한 친구3은 가자마자 뻗었고, 강적인 친구1은 새벽 2시에 나가떨어졌다. 잘하면 우승하겠네, 했지만 3시가 조금 못되어 뻗어 버렸다. 그래도 2등은 했으니 그런대로 만족하련다. 그런 일이 별로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몸이 좀 힘들었다.

안주: 숙소에서 마실 때, 내가 먹을 안주로 참치캔을 하나 샀다. 젊은 시절, 너무 속이 상할 때마다 난 참치캔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었는데, 오랜만에 그 생각이 나서였다. 하지만 막상 먹으려고 하니 젓가락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캔을 따는데 꼭지만 떨어져 버렸다. 캔만 딸 수 있었어도 1등할 수 있었는데....

동성애: 이반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우리들은 남자 친구들끼리 서로 좋아한다는 식의 농담을 가끔 한다. 오는 차 안에서 내가 친구2와 사귀니 뭐니 했는데, 그만 결정적인 장면을 들켜버렸다. 내가 친구2와 껴안고 있는데 유부녀가 우리방에 왔다가 그걸 보고 놀란 것. "너희들, 진짜였구나!"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전모는 이렇다. 내가 쓴 책을 그에게 주면서 "다 네 덕분이다"는 뜻으로 포옹을 한 것. 그 순간에 들어오다니, 정말 드라마가 따로없다.

귀가; 원래 일정은 2박3일이고, 지금 다른 친구들은 속초에서-오대산서 1박을 한 후 속초로 왔다-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지만, 난 사정상 먼저 왔다. 이유인즉슨 내가 없으면 벤지가 밥을 잘 먹지 않으며, 내일 아침 테니스를 쳐야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내가 없으면 벤지가 변을 보지 않는다는 것. 대변도 많이 누는 녀석이라 사흘을 참는다면 몸의 3분의 1 이상이 대변으로 가득찰 터, 그래서 난 1박2일 이상의 여행은 거의 하지 못한다. 원래는 친구2 차로 서울에 오기로 했는데, 그가 미녀의 유혹에 넘어가 안가기로 했단다. 배신을 당한 나는 어떻게 서울에 올까 고민하다가, 양양에 공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두 번밖에 없는 서울행 비행기에 극적으로 올라탔다. 차를 탔으면 엄청나게 밀렸을테고, 피로가 쌓여 내일 테니스도 대충 쳤겠지만, 난 8시도 못된 시각에 서울에 왔고, 지금 집에서 편안히 글을 쓰고 있다. 출혈이 크긴 했지만 역시 돈이 좋다. 돈=편안함.

착각: 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먼저 와서 미안했다. 더 미안한 건, 내가 없으면 수다떨 사람도, 술자리를 주도할 사람도 없으니 남은 애들이 재미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집에 와서 메시지를 보내니 웬걸, "우리 너무 재밌게 놀고있어!"라는 답이 날아온다. 으음, 그렇군. 내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군!

회상; 2월의 마지막 이틀간을 다시 떠올려 본다.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 추억은 오래도록 내 머리에 남아, 내가 힘들 때마다 완충제가 되어 주리라. 내게 이런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준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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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4-02-2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를 위해 비행기를 타시다니.......놀라움이었습니다....하긴 저사진과 흡사하다면 사랑스러울만한데.......그리고 혹 친구분들이 우리가 벤지만도 못하단거지??...그럼서 보란듯이 더 잘노신게 아닌지....ㅋㅋ.....근데.....저그림의 벤지는 어린시절 만화에 나왔던 그강아지 아니어여??.....예전에 그 뭐지??....덩치 큰 흰강아지옆에 또 쪼그만 푸치(?)인가 쬐그만 강아지도 있었던.....자꾸 그강아지가 생각나네요.........^^

비로그인 2004-03-01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사랑이 정말 눈물겹네요...ㅠㅜ 참치캔 얘기를 들으니 저두 옛생각이 나고, 착각 부분에선 또 실실 웃고 말았다는..ㅎㅎ 4년에 한번 온다는 2월의 29일을, 너무 즐겁게 잘 보내신거 같아서 좋네요~~ ^^

쎈연필 2004-03-01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드림팀... 이 대목에서 뒤집어집니다 ㅎㅎㅎㅎㅎㅎ

플라시보 2004-03-0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두상자님 의견과 동일. 그 외에도 수시로 뒤집어지다 갑니다.^^

paviana 2004-03-02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동창들 정말 좋죠..저도 그때 친구들이랑 같이 있으면 호칭의 반이 욕이랍니다.이나이에 그애들 아니면 언제 그렇게 불려보겠습니까? 말달리자는 노래에서 제일 제가 감명받은 부분이 `차 있으면 빨리 가지' 인데, 비행기는 더 빠르군요..좋은 여행 부럽네요..

마태우스 2004-03-0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또 놀러 오세요!
파비아나님/인터넷이 아니었던들 그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었을테니, 인터넷에 감사하렵니다.
자두상자님/어, 그말이 웃겼나보죠? 드림팀 맞는데...
책읽는나무님, 앤티크님/지금 현재에 있어서 벤지는 제게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벤지에게 저는 우주일 테고요. 그런 벤지에 비하면 제가 벤지에게 소홀한 편이죠.
 

 

 

 

 

 

"암행어사 박문수!"
지하철 5호선, 파란 추리닝을 입은 아저씨가 소리를 지른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가 이내 돌아간다. 그 말만으로도 아저씨의 상태를 알기에는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아저씨는 계속 외친다.
"내가 암행어사 박문수의 40대 후손이여! 한때는 천하가 내것이었어!"
거기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아저씨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전철을 탄 젊은 여성에게 "안녕하세요?"라고 하고-머리를 빡빡 깎은 아저씨라 외모가 무섭다-그네들이 도망치자 "도망가는 사람은 내 칼에 죽을 것이오"라고 하질 않나, 어린애가 자신을 피하자 "야, 임마!"라고 하질 않나. 나처럼 험악하게 생긴 사람은 건들지 않는 걸로 보아, 정신은 혼미해도 만만한 상대는 알아보나보다.

내가 매일 오가는 천안역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약간 모자란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데, 그는 역 어딘가에 앉아 있다가 기차에서 사람들이 내리면 잽싸게 광장으로 뛰어나오고, 사람들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이런다. "어이, 아저씨!!!" 대개 모른척하고 그를 지나치는데, 그러면 그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시발놈!"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처음에는  남자한테는 그러지만, 여자한테는 쫓아가서 때리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외친다. "칵!" 만만한 상대에게 좀 더 과격한 것은 이사람도 똑같다.

육체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듯이, 이 사람들처럼 정신에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나라는 장애자의 지옥이다. 인도에 설치된 턱은 수많은 장애자를 절망케 하고, 혜화역서 휠체어로 전동차를 오르던 사람이 굴러떨어져 죽는 일도 발생한다. 장애자 대표인 박래군 님이 수없이 시위를 해도, 그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장애자들은 모두 어디론가 숨어 버려, 서울 거리는 장애자를 보기가 가장 힘든 곳이다. 이를테면 장애자들의 자발적인 격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예전에는 나도 힘들게 휠체어를 미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들은 왜 나와서 저래?"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책을 읽은 지금은 장애인에게 열악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고, "한명도 이용하지 않더라도 장애인 시설은 있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물론 실천은 하나도 안한다). 난 더 많은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들과 공존함으로써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 갖는 편견이 교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난 뇌성마비자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런 이유로 영화 <오아시스>조차 보지 못했지만, 그들 역시 우리가 더불어 살아야 할 이땅의 성원들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은 정신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난 정신적 장애인에게는 그다지 관대하지 못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정신에 어느 정도의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정신적 장애인이 일으키는 범죄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범죄는 우리가 멀쩡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씩 눈에 띄는 정신적 장애인은 내게 당장의 위협으로 느껴진다. 격리가 아닌 공존이 최선의 해법임을 알면서도 "저 사람 어디 좀 데려갔으면" 하는 마음이 이따금씩 드는 것은 그때문이다. 그런 걸로 미루어 볼 때, 말은 번지르르하게 할지언정, 난 그들을 내가 더불어 살 사람들로 여기지 않는 거다. 철학자 김상봉님에 의하면, 그들의 고통을 내 것인 양 느끼고, 그들을 내 형제로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세계시민이 된 것'이란다. 난 언제쯤 세계시민이 될 수 있을까?

* 시간이 없어서 졸속 마무리를 했습니다. 오대산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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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2-29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비님/그렇죠. 국가적인 대책이 있어야겠죠... 검은비님 이미지가 얼마 전에 바뀌어졌지요? 훨씬 더 멋져진 건 틀림없지만, 아직은 그전 이미지가 더 친숙합니다. 적응하는데 며칠 걸리겠지요... 참, 저 잘 다녀왔습니다.

진/우맘 2004-03-01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지하철을 탔었는데 말입니다...저는 매번 드는 생각이, 장애인용 리프트가 오르내릴 때 왜 그렇게 큰 소리로 듣기 싫은 '즐거운 곳에서는~'이 울려퍼져야 할까요? 생각해보면, 아마도 리프트가 가니 비키세요~하는 것 같지만, 제가 그 리프트 위에 타고 있다면 시끄러운 단화음의 음악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지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고 싫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즐거운 나의집'은 안타깝게도 지하철에서 구걸하시는 분들이 가장 선호하시는 음악이라 더더욱...
 

 

 

 

 

 

어제는 십며칠만에 술을 안마시는 날이었다. 정말 간만에 저녁을 집에서 먹기로 어머님과 약속까지 한 터. 학교 일이 늦게끝나 딴지에 도착한 건 밤 8시 15분이었고, 그때부터 싸인을 시작해 9시 40분쯤 끝을 냈다. 내가 싸인을 하는 동안 딴지 친구들은 맞고를 치거나,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싸인을 마친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저... 제가 맥주라도 한잔 대접해야 하는데, 집에 일이 좀 있어서...핫핫"

그의 말이다. "무슨 말이어요? 맥주라도 한잔 해야지!"

알고보니 그들은 일을 다 끝내놓은 뒤 날 기다린 거였다. 그런 충정을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난 영등포 근처의 맛집 <벽돌집>으로 갔고, 고기를 안주삼아 소주 두병을 나누어 먹었다. 하지만 그 둘이 마신 건 잘해야 반병 정도일테고, 나머진 모두 내 입으로 들어갔다. 소주 한병 초과부터는 술 한번으로 치는 관행상, 어제도 '쉬는 날'이 아니었다. 주당들과 오대산에 놀러가는 오늘도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실 것은 당연한데, 난 언제나 쉬게 될까?

집에 갔더니 어머님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날 기다리고 계신다.

"저...어머니...사실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엄마가 소리를 치신다. "너, 오늘은 약속했어!"

그 서슬에 놀라 이렇게 반격했다. "누가 뭐랬나요? 빨리 밥 줘요!"

난 낚지볶음에다 밥 한공기를 비벼서 꾸역꾸역 다 먹었다. 술도 알딸딸하고 배가 불러 잠이 오지 않았고,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렇다고 어제의 술자리가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액자가 딸린 이효리 사진(산사춘 광고)을 얻었으니까! 담주에 출근하면 내 연구실에 걸어놓아야겠다. 음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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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28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되요~ 제발 한번쯤 쉬어주세요~ 옥체보존하시라니까요~ >0< 어머니는 서운하셨겠어요...전화라도 주시지...

nalchong 2004-04-26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오늘 장마처럼 댓비가 쏟아져도 기분이 좋을 것같습니다. 연구실 틈새로 목격한 이효리 사진의 출처를 알게되었으니까요!! 이래저래 '잰 뭐지~'하는 뒷끝을 남기게 될까봐 글을 남기는 것이 조심스러웠는데요...저의 궁금함의 한토막이 해결되는 기쁨에 그만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앞방 교실의 연구원으로 잠시 있었더랬거든요. '그 이효리 액자는 어디서 난 것일까'하는 생각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직접 여쭈어볼까도 생각했었다니까요....우연의 음악에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주절주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