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동창들과 오대산에 다녀왔다. 이 나이에도 친구들과 그렇게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내가 너무 행복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멤버; 여행을 간 멤버는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유부녀, 이혼녀, 이혼남, 독신남에, 이혼을 앞두고 있는 친구-얘는 요즘 걸핏하면 나한테 술마시자고 전화를 건다-임신한 아내와 싸우고 집을 뛰쳐나온 친구, 그야말로 드림팀 아닌가? 남편을 버리고 여행을 온 유부녀가 준재벌에다 뻑하면 "오늘은 내가 쏠께!"라고 외치던 애였고, 또한 알아주는 미식가였던 덕분에, 편하고 즐겁고 맛있는 이틀을 보낼 수 있었다.

갈 때; 내 특기는 수다다. 차를 타고 있는 동안 난 쉴새없이 수다를 떨었는데, 이따금씩 대화에 참여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수다를 떠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피곤하단다. 어쨌든 그 수다 덕분에 차들이 꽉 밀린 머나먼 길을 즐겁게 갈 수 있었다. 허물없는 친구들이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편했다.

1차: 감자전, 닭도리탕, 만두국을 안주로 각자 취향에 따라 술을 마셨다. 나와 친구1, 친구2는 소주를, 여인1은 백세주를 마셨고, 친구3은 유부녀가 가져온 '설화'-정종이란다-를 두병이나 마셨다. 소주 4병을 셋이서 나눠 먹었으니, 내가 마신 건 한병이 조금 넘을게다. 손님이 다 없어지자 우린 구석에 놓여 있던 기타를 집어들고 노래를 불렀다. 취미로 그룹활동도 하고있는 친구3이 기타를 쳤으며, 80년대 학번답게 이문세, 비틀즈, 최호섭-세월이 가면-동물원, 김현식, 유제하의 노래들을 불렀다. 나보다 노래 가사를 더 많이 아는 애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2차: 유부녀가 가져온 양주를 놓고 숙소에 모여앉았다. 너무 혹사했는지 내 몸이 술을 잘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마셨다. 술이 약한 친구3은 가자마자 뻗었고, 강적인 친구1은 새벽 2시에 나가떨어졌다. 잘하면 우승하겠네, 했지만 3시가 조금 못되어 뻗어 버렸다. 그래도 2등은 했으니 그런대로 만족하련다. 그런 일이 별로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몸이 좀 힘들었다.

안주: 숙소에서 마실 때, 내가 먹을 안주로 참치캔을 하나 샀다. 젊은 시절, 너무 속이 상할 때마다 난 참치캔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었는데, 오랜만에 그 생각이 나서였다. 하지만 막상 먹으려고 하니 젓가락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캔을 따는데 꼭지만 떨어져 버렸다. 캔만 딸 수 있었어도 1등할 수 있었는데....

동성애: 이반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우리들은 남자 친구들끼리 서로 좋아한다는 식의 농담을 가끔 한다. 오는 차 안에서 내가 친구2와 사귀니 뭐니 했는데, 그만 결정적인 장면을 들켜버렸다. 내가 친구2와 껴안고 있는데 유부녀가 우리방에 왔다가 그걸 보고 놀란 것. "너희들, 진짜였구나!"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전모는 이렇다. 내가 쓴 책을 그에게 주면서 "다 네 덕분이다"는 뜻으로 포옹을 한 것. 그 순간에 들어오다니, 정말 드라마가 따로없다.

귀가; 원래 일정은 2박3일이고, 지금 다른 친구들은 속초에서-오대산서 1박을 한 후 속초로 왔다-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지만, 난 사정상 먼저 왔다. 이유인즉슨 내가 없으면 벤지가 밥을 잘 먹지 않으며, 내일 아침 테니스를 쳐야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내가 없으면 벤지가 변을 보지 않는다는 것. 대변도 많이 누는 녀석이라 사흘을 참는다면 몸의 3분의 1 이상이 대변으로 가득찰 터, 그래서 난 1박2일 이상의 여행은 거의 하지 못한다. 원래는 친구2 차로 서울에 오기로 했는데, 그가 미녀의 유혹에 넘어가 안가기로 했단다. 배신을 당한 나는 어떻게 서울에 올까 고민하다가, 양양에 공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두 번밖에 없는 서울행 비행기에 극적으로 올라탔다. 차를 탔으면 엄청나게 밀렸을테고, 피로가 쌓여 내일 테니스도 대충 쳤겠지만, 난 8시도 못된 시각에 서울에 왔고, 지금 집에서 편안히 글을 쓰고 있다. 출혈이 크긴 했지만 역시 돈이 좋다. 돈=편안함.

착각: 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먼저 와서 미안했다. 더 미안한 건, 내가 없으면 수다떨 사람도, 술자리를 주도할 사람도 없으니 남은 애들이 재미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집에 와서 메시지를 보내니 웬걸, "우리 너무 재밌게 놀고있어!"라는 답이 날아온다. 으음, 그렇군. 내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군!

회상; 2월의 마지막 이틀간을 다시 떠올려 본다.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 추억은 오래도록 내 머리에 남아, 내가 힘들 때마다 완충제가 되어 주리라. 내게 이런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준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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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4-02-2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를 위해 비행기를 타시다니.......놀라움이었습니다....하긴 저사진과 흡사하다면 사랑스러울만한데.......그리고 혹 친구분들이 우리가 벤지만도 못하단거지??...그럼서 보란듯이 더 잘노신게 아닌지....ㅋㅋ.....근데.....저그림의 벤지는 어린시절 만화에 나왔던 그강아지 아니어여??.....예전에 그 뭐지??....덩치 큰 흰강아지옆에 또 쪼그만 푸치(?)인가 쬐그만 강아지도 있었던.....자꾸 그강아지가 생각나네요.........^^

비로그인 2004-03-01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사랑이 정말 눈물겹네요...ㅠㅜ 참치캔 얘기를 들으니 저두 옛생각이 나고, 착각 부분에선 또 실실 웃고 말았다는..ㅎㅎ 4년에 한번 온다는 2월의 29일을, 너무 즐겁게 잘 보내신거 같아서 좋네요~~ ^^

쎈연필 2004-03-01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드림팀... 이 대목에서 뒤집어집니다 ㅎㅎㅎㅎㅎㅎ

플라시보 2004-03-0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두상자님 의견과 동일. 그 외에도 수시로 뒤집어지다 갑니다.^^

paviana 2004-03-02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동창들 정말 좋죠..저도 그때 친구들이랑 같이 있으면 호칭의 반이 욕이랍니다.이나이에 그애들 아니면 언제 그렇게 불려보겠습니까? 말달리자는 노래에서 제일 제가 감명받은 부분이 `차 있으면 빨리 가지' 인데, 비행기는 더 빠르군요..좋은 여행 부럽네요..

마태우스 2004-03-0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또 놀러 오세요!
파비아나님/인터넷이 아니었던들 그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었을테니, 인터넷에 감사하렵니다.
자두상자님/어, 그말이 웃겼나보죠? 드림팀 맞는데...
책읽는나무님, 앤티크님/지금 현재에 있어서 벤지는 제게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벤지에게 저는 우주일 테고요. 그런 벤지에 비하면 제가 벤지에게 소홀한 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