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박문수!"
지하철 5호선, 파란 추리닝을 입은 아저씨가 소리를 지른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가 이내 돌아간다. 그 말만으로도 아저씨의 상태를 알기에는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아저씨는 계속 외친다.
"내가 암행어사 박문수의 40대 후손이여! 한때는 천하가 내것이었어!"
거기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아저씨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전철을 탄 젊은 여성에게 "안녕하세요?"라고 하고-머리를 빡빡 깎은 아저씨라 외모가 무섭다-그네들이 도망치자 "도망가는 사람은 내 칼에 죽을 것이오"라고 하질 않나, 어린애가 자신을 피하자 "야, 임마!"라고 하질 않나. 나처럼 험악하게 생긴 사람은 건들지 않는 걸로 보아, 정신은 혼미해도 만만한 상대는 알아보나보다.

내가 매일 오가는 천안역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약간 모자란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데, 그는 역 어딘가에 앉아 있다가 기차에서 사람들이 내리면 잽싸게 광장으로 뛰어나오고, 사람들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이런다. "어이, 아저씨!!!" 대개 모른척하고 그를 지나치는데, 그러면 그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시발놈!"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처음에는  남자한테는 그러지만, 여자한테는 쫓아가서 때리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외친다. "칵!" 만만한 상대에게 좀 더 과격한 것은 이사람도 똑같다.

육체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듯이, 이 사람들처럼 정신에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나라는 장애자의 지옥이다. 인도에 설치된 턱은 수많은 장애자를 절망케 하고, 혜화역서 휠체어로 전동차를 오르던 사람이 굴러떨어져 죽는 일도 발생한다. 장애자 대표인 박래군 님이 수없이 시위를 해도, 그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장애자들은 모두 어디론가 숨어 버려, 서울 거리는 장애자를 보기가 가장 힘든 곳이다. 이를테면 장애자들의 자발적인 격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예전에는 나도 힘들게 휠체어를 미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들은 왜 나와서 저래?"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책을 읽은 지금은 장애인에게 열악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고, "한명도 이용하지 않더라도 장애인 시설은 있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물론 실천은 하나도 안한다). 난 더 많은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들과 공존함으로써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 갖는 편견이 교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난 뇌성마비자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런 이유로 영화 <오아시스>조차 보지 못했지만, 그들 역시 우리가 더불어 살아야 할 이땅의 성원들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은 정신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난 정신적 장애인에게는 그다지 관대하지 못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정신에 어느 정도의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정신적 장애인이 일으키는 범죄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범죄는 우리가 멀쩡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씩 눈에 띄는 정신적 장애인은 내게 당장의 위협으로 느껴진다. 격리가 아닌 공존이 최선의 해법임을 알면서도 "저 사람 어디 좀 데려갔으면" 하는 마음이 이따금씩 드는 것은 그때문이다. 그런 걸로 미루어 볼 때, 말은 번지르르하게 할지언정, 난 그들을 내가 더불어 살 사람들로 여기지 않는 거다. 철학자 김상봉님에 의하면, 그들의 고통을 내 것인 양 느끼고, 그들을 내 형제로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세계시민이 된 것'이란다. 난 언제쯤 세계시민이 될 수 있을까?

* 시간이 없어서 졸속 마무리를 했습니다. 오대산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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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2-29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비님/그렇죠. 국가적인 대책이 있어야겠죠... 검은비님 이미지가 얼마 전에 바뀌어졌지요? 훨씬 더 멋져진 건 틀림없지만, 아직은 그전 이미지가 더 친숙합니다. 적응하는데 며칠 걸리겠지요... 참, 저 잘 다녀왔습니다.

진/우맘 2004-03-01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지하철을 탔었는데 말입니다...저는 매번 드는 생각이, 장애인용 리프트가 오르내릴 때 왜 그렇게 큰 소리로 듣기 싫은 '즐거운 곳에서는~'이 울려퍼져야 할까요? 생각해보면, 아마도 리프트가 가니 비키세요~하는 것 같지만, 제가 그 리프트 위에 타고 있다면 시끄러운 단화음의 음악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지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고 싫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즐거운 나의집'은 안타깝게도 지하철에서 구걸하시는 분들이 가장 선호하시는 음악이라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