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같이 테니스를 치는 회원 중에 나랑 마음이 잘 맞는 형님이 있다.
나와는 달리 테니스도 아주 잘 쳐서,
백핸드를 칠 때는 페더러를 보는 듯하다.
페더러의 삶을 다룬 <페더그래피카>가 나왔을 때,
그 형님에게 보내드렸다.
"페더러를 닮으신 형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립니다."라는 선물메시지와 함께.
형님은 매우 기뻐하시면서 잘 읽을게, 라고 했다.
그게 보름 전 일이다.
엊그제, 피곤해서 밤 10시부터 자기 시작했는데 문자가 왔다.
확인해보니 그 형님이었다.
"책 잘 읽을게요!"라고 쓰여 있었다.
뭐야. 지난번에 얘기해놓고선 왜 또? 그리고 책 준 지가 언젠데 이제 읽기 시작하는 거야?
혹시 예전에 보낸 문자가 며칠만에 온 건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난 너무 피곤했기에 답을 안하고 그냥 잤다.
오늘, 밴드에 들어가보니 책 몇권을 쌓아놓은 사진이 올라와 있고,
이런 설명이 있었다.
"사랑하는 후배가 또 책선물을 해줘서 밤새 읽어야겠어요."
사진을 확대해서 책의 목록을 봤다.
-우리 사우나는 JTBC 안봐요 (박생강)
-응급실에 아는 의사가 생겼다 (최석재)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읽기 (이현우)
-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 (이현우)
-신이 없는 달 (미야베 미유키)
아니, 저 책들은 내가 얼마 전 주문했던 건데???
그제야 난 사태의 전모를 파악했다.
1) 그 형님에게 페더그래피카를 보냈다.
2) 보름 후 내가 원하는 책을 골라 주문을 했다.
3) 그런데 알라딘의 주소창엔 최근 배송지가 떠 있었다.
4) 그래서 그 책들이 그 형님에게 갔다.
5) 그 형님은 내게 고맙다고, 잘 읽겠다고 했다.
잘 읽겠다고 인사까지 하는데 이제와서 "형님, 그거 제 책인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난 다음과 같이 댓글을 달았다.
"잼나게 읽어주세요!"
다 내 취향의 책이라 그 형님이 잘 읽어주실지 모르겠지만
평소 책을 좋아하던 분이니 그냥 쌓아두진 않을 것 같다.
저 책들은 내가 꼭 읽으려고 했던 거라 다시 주문을 해야 하지만,
좋은 책들의 세일즈 포인트가 오르고, 널리 읽힌다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먼 훗날, 그러니까 3년쯤 지난 후 그 형님께 사실을 말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형님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훼손시키면 안될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