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해부학 이론은 그렇게 넘어간다 쳐도 매주 세시간의 실습이 문제였다. 올 여름 내내, 난 도대체 어떻게 애들 실습을 해야 할지 걱정하느라 마음 편히 잔 적이 없다. 이걸 할까, 저걸 할까. 생각은 무성했지만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기초 교수가 20명이니 두명씩만 맡아서 실험을 가르친 뒤 보고서를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아 보였지만, “감당이 안된다”는 반발에 부딪혀 포기해야 했다. 어찌되었건 그 고민은 나만의 것이었고, 학기 시작은 점점 다가왔다. 난 결국, 떠오른 계획 중 가장 하수를 택해야 했다.


학생들한테 이랬다.

“의사가 나온 영화들을 보고 매주 A4 한 장으로 간단히 리포트를 쓰시는 겁니다... 왜 의사가 되려고 했는지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좋은 기회잖아요.”

근데 의학을 다룬 영화는, 재미없는 영화를 빼면 별로 없다.

“꼭 의사에 초점을 맞추지 않더라도 영화에 취미를 갖는 건 좋은 일입니다. 나중에 의사 돼서 돈 벌면 맨날 룸살롱만 가는 게 다른 취미가 없기 때문이어요. 전 말이죠, 부부끼리 극장에 가는 게 참 아름다워 보입디다. 혹시 아나요. 여러분이 이 영화들을 보고 영화에 눈을 뜰지.”


난 영화 전문가와 상의한 끝에 영화들을 골랐고, DVD를 주문했다. 학교에서 틀어주는 거니 최대한 정품을 사려 노력했지만, 품절된 게 너무 많다는 게 어려운 점이었다. 또한 아무리 작품성이 좋아도 재미가 없으면 소용 없다고 보는지라 다른 네티즌의 평을 보면서 재미있는 영화만 가려내려 노력했다(“정말 감동이었어요.”라는 평이 우세한 <존 큐>가 그렇게 선별된 영화다).


교과목 소개를 하러 들어간 C 교수의 말이다. “실습 안하고 영화만 본다고 하니 애들 분위기가 싸해지더라구요. 한명이 질문을 해요. 그럼 실습은 아예 안하냐고요. 미안하다고 했죠.” C 교수, 나쁜 사람은 아니다. 비교해부학 책임교수를 맡아달라고 여기저기 사정할 때, 유일하게 수락해 준 사람이다. 그가 책임교수일지언정 난 그에게 모든 걸 맡기고 나자빠질 수는 없었다.


애들한테 영화만 보라고 하는 건 무성의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을 땐, 그 와중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비교해부학 실습은 20명씩 분반으로 진행되었다. 화요일 오전 세시간, 오후 세시간. 성의가 없어 보이지 않으려고 난 오전과 오후, 각각 다른 영화를 틀었다. 같은 영화를 틀어주면 뭐하러 분반을 하겠는가? 오전엔 유전학 수업 때문에 계속 있어줄 수 없지만, 그래도 40분 정도는 애들이랑 같이 영화를 봤다. 2시부터 시작되는 오후반에선 애들과 끝까지 영화를 봤다(그래서 내가 화요일엔 아무 일도 못한다는...). 우리학교 시청각 교육실에서 영화를 보니 극장 분위기도 나는 등 그런대로 괜찮았다. 초반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는 학생들의 태도는 아주 좋다. <패치 아담스>를 본 학생은 출석만 하고 나가도 된다고 했지만, 다들 자리를 지켰다. 하긴, 의대에 들어오기 전에 본 패치 아담스와 지금 보는 그것은 또 다르지 않을까? 지금까지 틀어준 영화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첫주 

오전반; <애널라이즈 디스>

“닥터 지바고처럼 지루한 영화일 줄 알았는데 재미있어서 좋았다.”

“진지한 영화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여러 코믹한 장면들을 연출하며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오후반: <빨간 구두>

“잦은 정사씬이( 때문에) 여자 동기들과 같이 보기에 부끄럽기도 해서 뒤에서 그들의 반응을 힐끗힐끗 보기도 했다”

참고로 어떤 학생은 “시도 때도 없이 하네”란 탄식을 했고, 남자가 사랑한다고 페넬로페 크루즈에게 고백을 하는 장면에선 “개새끼!”라는 말도 나왔다. 이게 야하단 소문이 나서인지 오전반 애들이 “우리도 빨간구두를 틀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둘째주 

오전반: <패치 아담스>

리포트를 안받아서 반응을 알 수는 없지만, 다시 봐도 재미있었으고, 애들도 괜찮아하는 것 같더만...


오후반: <존 큐>

하마터면 울 뻔했다... 학생들은 영화가 끝나자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기도 했다.


이걸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역시 영화가 재미있냐 없느냐도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난 이렇게 말했다. “너무 의사 영화만 보면 머리가 아프니까 다음주엔 다른 거 봐요. 인간과 삶에 대해 성찰하게 해주는 영화입니다.”

여기서만 살짝 공개하는데 다음주 영화 제목은 오전반 <에이트 빌로우>, 오후반 <in her shoes(당신이 그녀라면)>다.


* DVD 주문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도망자>-의사 나온 게 하도 없어서 주문했는데 안틀까 싶다.

<이도공간>-장국영 팬들이 별점 다섯을 주는 바람에 주문. 내가 한번 보고 판단하겠다.

<쉰들러 리스트>-이거, 재미있어 할까? 별점은 9점대던데.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명화긴 한데, 심각하게 고민 중. 애들이 과연 재미있어 할지.

<잉글리쉬 페이션트>-글세...어찌해야 할까?

이하 생략. 휴, 강의준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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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6-09-14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도망자를 비디오로 한번도 안 보셨어요? 그건 애들이 케이블에서 하도 많이 해줘서 많이 봤을텐데.......

비로그인 2006-09-1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뭐냐 영화 말고요, 미국 드라마 재밌지 않나요 'ER' 같은거...^^

마태우스 2006-09-1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님/저야 영화로 봤지요 근데 애들도 봤을까 싶었는데, 보고 안보고를 떠나서 재미가 없었던 기억이 나서 말이죠....

마태우스 2006-09-14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님/ER은 분석 결과 재미없는 걸로 판명되었어요 하우스가 유력 후보인데요 DVD를 구할 수가 없다는... 글구 본 애들이 있더라구요.

sooninara 2006-09-14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시네요^^ 영화감상을 취미로 가지면 룸사롱 덜갈까요?

춤추는인생. 2006-09-14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영화를 알면 알려드릴텐데. 의학을 소재로 한 영화중에서 님이 말씀하신것이상으로 제가 아는게 없네요.
참고로 저는 ..e.r 매니아랍니다... 시즌1부터 8까지^^ 닥터카터가 좋아졌어요 ㅎㅎ

마노아 2006-09-14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도 빨간구두를 틀어달라! 너무 웃겨요^^
닥터 노구찌 애니로 없나요? 닥터 k도,.^^;;;

해리포터7 2006-09-15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저도 하우스를 추천합니다! 그 드라마보고 의사에 대하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또 하나 생각났는데요..제목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요.로빈윌리엄스랑 로버트 드니로가 나온 영화인데 로버트드니로가 뇌염때문에 무슨 장애가 생기는 그런영화에요..물론 로빈윌리엄스가 의사구요.

2006-09-14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6-09-14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사가 아니라 환자를 다룬 영화를 찾으면 좀 더 다양해지지 않을까요? 가령 <필라델피아>라든가.

Mephistopheles 2006-09-14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장선생이라는 일본영화도 어떻게 보면 의사가 주인공인 영화가 아닐까요..^^


그리고 제가 봤던 영화 중에는 뭐니뭐니해도 윌라암 허트가 주연한 `닥터'라는
영화가 제일 좋았습니다. 환자와 의사의 입장을 서로 바꿔서 생각하게 해줬었습니다.
(아쉽게도 국내 출시가 안되었습니다.윽.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번 보도록 하세요)



닥터 기글 같은 공포영화는 안되겠죠.?=3=3=3=3




하루(春) 2006-09-14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나 추천할게요.
오래된 영화라 DVD가 있을진 모르겠는데 <유혹의 선(Flatliners)>이라는 조엘 슈마허 감독의 1990년 작품입니다. www.cine21.com에서 영화 검색해보면 간단한 내용이 나와 있구요. 볼만한 영화예요.

클리오 2006-09-14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알라딘은 많은 것을 가르쳐준대니까요.. 저도 조선인님 말씀과 같은 생각... 그나저나 개구리라도 해부해보심이... ^^;; =3=3=3

하루(春) 2006-09-14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꼭 의사를 주제로 한 것도 좋지만, 소외된 계층(주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영화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아이 엠 샘>, <제8요일> 같은 거요.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권해드리는 겁니다.

2006-09-14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9-14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6-09-15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네 알겠습니다 그때 뵈요. ^^
하루님/그런 것도 좋겠네요. 근데 아이앰 샘은 좀 유명한 영화라, 본 애들이 있을 것 같아서요... 비주류 영화나 오래된 영화 위주로 한 건 그 때문인데요 한번 물어보죠 뭐. 유혹의 선,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리오님/개구리와 쥐 해부에 반대하는 이유가요 별 도움도 안되는데 애꿏은 생명을 죽이는 것 같아서랍니다....
메피님/간장선생은 제가 본 건데요 그다지 재미가 없어서 커트되었어요...글구 닥터(The doctor)는 제 상담자가 추천한 건데요 출시가 안되었더라구요...
조선인님/필라델피아도 후보에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속삭이신 분/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그러면 비교해부학을 하는 게 되는 건데... 그렇다면 원래대로 생물학과에서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아무튼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해리포터님/한번 찾아볼께요. 그런 영화가 있었단 말이죠..
마노아님/후후 애들이 한창 때라서 말입니다^^ 애니는 좀 그렇죠...리얼리티가 떨어져 보이지 않나요???
춤추는인생님/er 매니아시군요! 전 er 시즌 원 봤는데요 학생들 보면 별루겠다 싶던데요... 사건이 너무 여러개 일어나서 말이죠..
수니님/그러지 않을까요??^^

코마개 2006-09-15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drfa.co.kr
여기 가셔서 검색하시면 훌륭한 영화 많이 나옵니다.

그린티☆ 2006-09-15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교해부학 저는 예과때 못배웠는데..^^ 전 3Q 때 드디어 기생충학 시작했는데 .. 교수님이 너무 재밌으셔서 웃다가 수업시간 다 가는거 같아요 ㅎㅎ

비자림 2006-09-1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생각하는 것과 동떨어질 것 같지만, '레인맨'과 '포레스트 검프'는 어떠하온지요?



마태우스 2006-09-19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레인맨은 넘 오래되어 현대 감각에 안맞을 거 같아요. 애들이 재미를 느껴야 할텐데...글구 포레스트 검프는....좋은 것 같은데요 감사합니다
그린티님/아앗 선생님이 누구신가요? 우리 학계에 유머있는 분이라곤 ksi 선생님밖에 없는데...
강쥐님/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정말로.

마태우스 2006-09-19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린티님/님 방명록 가봤어요. 제가 님한테 글 남긴 걸 잊고 있었네요. 역시 ksi님이시더군요. 그분 유머야 당대 최고죠. 저처럼 말한두마디 웃긴 걸 하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강의시간을 지배하며 웃음을 주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