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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사냥꾼 - 이적의 몽상적 이야기
이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96년 12월 1일, 운이 좋게도 그날 난 이적이 MC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문세의 뒤를 이어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게 된 것. 그날 그는 말 한번 꼬이는 법 없이 두시간의 데뷔전을 훌륭하게 치러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적은 천재였다. 잠깐 같이 있는데도 천재성이 느껴졌고, 그가 내뿜는 기가 워낙 강해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적이 별밤을 맡은 후 청취율은 훨씬 더 높아졌다고 한다.
명 가수에 명 MC인 그가 ‘지문사냥꾼’이란 책을 냈단다. 모 출판사에 계시는 분이 고맙게도 이 책을 내게 선물하셨는데, 먼저 읽은 조교선생은 내게 책을 돌려주며 “참 재미있다.”고 말했다. 나 역시 같은 말을 하련다. ‘이적이 썼다는 걸 감안하면 재미있다.’는 게 아니라, 이적의 명성을 지우고 읽어도 재미있을 법하다. 물론 이적이 아닌 다른 사람이 썼다면 이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환타지에 그다지 관심은 없었지만, 그가 그리는 환타지는 내가 감내할 만한 수준이었고, 이야기 속에 소수자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는 게 느껴진다. 굳이 비교하자면, 서 모 씨가 쓴 <대통령과 말미잘>은 물론이고 베 모 작가가 쓴 <나무>보다도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는 컴퓨터가 다운되거나 인터넷이 멈춘다든지, 펜이나 가위가 있어야 할 곳에 없는 건 외계령(외계의 영혼)이 모종의 실험을 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하고, 남의 귀를 파주는 걸 직업으로 삼는 ‘제불찰’ 씨를 통해 소통이 막혀버린 사회를 풍자한다.
“제씨 앞에 열린 귀는 실상 굳게 닫혀 있었다.”
다음 대목은 그의 유머감각을 잘 보여준다.
“달팽이관을 통과할 때마다 비슷한 제목의 희대의 명곡을 흥얼거렸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여기서 언급된 희대의 명곡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은 신세대는 아닐 듯싶다.
이제 아쉬운 점. 책이란 모름지기 읽는 데 다섯시간 이상 걸려야 본전은 된다고 생각하는 내겐 글자도 크고 그림도 많으며-너무 많다-페이지 수도 200 남짓한, 그래서 읽는데 두시간이 채 안걸린 이 책이 아쉽다. 어느 단편들은 괜찮지만, ‘고양이’나 ‘음혈인간으로부터의 이메일’처럼 종잡을 수 없는 단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나처럼 그달의 책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사람, 이적의 팬, 환타지는 뭐든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과감히 1만원-알라딘에서는 9천원에 마일리지 2700점-을 투자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