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리부동’이란 한자어를 배우면서 전 절대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되지 않고자 했습니다.
맛없는 걸 맛있다고 말하지 않으려 했고
시험 전에 공부 안했다고 사기를 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좋으면서 싫은 척 내숭을 떨지 않으려 했고
시험 잘 보고서는 못 봤다고 하는 친구들을 미워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냐고 물으신다면
내숭에 관한 한 감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사옵니다.
이 학교에 발령을 받고나서 늘 잘릴 것을 걱정했습니다.
“설마 내숭을 떠는 거겠지”라며 절 의심하던 분들도
제가 발령 1년 후 연구실적 미비로 경고를 받는 걸 보면서
절 진심으로 이해했고
언제까지 버티나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차차차,라는 말이 있듯이
지난 8년의 세월은 한 순간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나날이었습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던 작년 12월,
운좋게 재임용을 통과했던 쾌거를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재임용 통과로 앞으로 3년을 보장받았다고 좋아할 무렵
올 8월에 부교수 승진 심사가 있다는 소식에 밤잠을 설치기 시작했습니다.
전 부교수가 싫은데, 계속 조교수로 있고 싶은데 하는 생각까지 했었지요.
승진은 때가 되면 당연히 되는 거라고 믿는 학장님한테 달려가
“제가 이번에 승진 못해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라고 하고픈 충동을 겨우 참았습니다.
운명의 8월은 갔고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9월이 왔습니다.
‘탈락’이라는 통지서가 언제쯤 올까 싶어서
웃어도 웃는 게 아니요,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에선 우리가 감히 이해하지 못할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가끔씩 일어나나 봅니다.
수업이 끝나서 연구실에 앉아 넋을 놓고 있는데
문자가 한 통 왔습니다.
교학과 직원 분이 보낸 “부교수 승급 축하드려요”라는 글귀를 보고서
전 아무 느낌이 없었습니다.
답을 했지요.
“진짜예요? 거짓말이면 저 너무 상처받을텐데, 진실을 말해 주세요.”
답은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후 다섯시 회의에 들어갔는데
학장님이 “부교수 되었는데, 한턱 안내냐?”고 합니다.
부교수 될 줄을 미처 모르고 돈 준비를 못했지만
“당연히 내야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제가 부교수가 된 걸 말이죠.
제 방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못추는 춤을 추었습니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까 지금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전화 받는 분들이 저만큼 좋아해줄지 모르지만
오늘은 아는 사람들에게 다 전화를 걸고 싶습니다.
저같은 날라리가 부교수가 되었다고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전 내숭을 떠는 사람이 아닙니다.
잘릴까봐 걱정한 것도 진짜였고
승진을 포기한 것도 100% 사실이었어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는지 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제가 부교수가 되었다는 겁니다.
절 아끼는 누군가가 저를 위해 마법의 빔을 쏴준 걸까요?
전 진짜로, 위에서 열거한 그런 내숭떠는 사람이 아닙니다.
경고 맞는다고 떠들고 다니다가 4.3 만점을 받고야 만 후배와는 질적으로 틀린 사람입니다.
혹시 절 그런 눈으로 보신다면
부디 거두어 주세요.
그저 억울할 뿐입니다.
저 자신은 제가 잘 안다고
부교수가 못될 걸 누구보다 잘 알았는데
되버린 걸 제가 어떡하냐고요.
사실 지금도 전 걱정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 앞으로 갈 공문이 제게 온 거고
‘탈락’이란 글자가 쓰인 게 다시 올까봐요.
이런 소심한 저한테 ‘내숭’이란 말은 하지 마세요.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전 정말 억울하다니까요.
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과정이야 모르지만,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전 이제 부교수랍니다.
제가 ‘부’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 사람들은 승진 안해도 부교수니까요.
지금 전, 정씨 성을 가진 교수를 부러워하기 시작했어요.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는가 봅니다.^^
아름다운 밤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