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하이라는 말을 난 야구에서 처음 들었다. 김병현이 삼진을 9개 잡았는데, 그게 자신이 한경기에서 기록한 최다 삼진이라고 할 때, ‘커리어 하이인 9개의 삼진을 잡았다’라는 말을 한다. 가끔 생각했다. 내 알콜의 커리어 하이는 과연 어느 날이었을까? 3년 전 횟집? 아니면 소주 대병을 마시던 97년? 하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2006년 8월 2일이 내가 생애에서 가장 많은 술을 마신 날로 기록될 것 같다.
82번째: 8월 1일(화)
세 미녀와 더불어 술을 마신 날. 술을 비우는 속도가 무척 빠른 강적이었기에 이분들을 만날 때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간다. 도미니카의 알콜 전문가 유스또에 의하면 술에 있어서 정신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63%라고 주장했다. 주량이 1.5배 차이가 나더라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60% 이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 과연 그랬다.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간 덕분에 난 나보다 주량이 훨씬 센 그들을 맞아 비교적 선전했고, 집에 갈 때 내 발로 걸어들어갔다. 하지만 격전의 여파로 그 다음날엔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고, 난 계속 헛구역질을 하면서 오전을 보내야 했다.
83번째: 8월 2일(수)
이승엽의 400호 홈런, 그리고 사촌형에게 보냈던 안부 메시지가 8월 2일의 술자리를 만들었다. 원래 매형, 매제와 술을 마시기로 했지만 극적으로 취소, ‘피곤한데 잘됐다.’며 간만에 엄마가 차려주신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날 이승엽이 친 400호 홈런의 감격을 함께 해줄 사람이 없던 게 문제였다. 난 일본야구 매니아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승엽 너무 잘하지 않냐?”는 내용으로 5분간 수다를 떨 예정이었다. 근데 그 친구가 내 전화를 받자마자 “요즘 많이 쌓인다”며 “술이나 한잔 하자”고 얘기한 것. 전날 술로 안좋았던 속은 해장을 위해 마신 점심 때의 소주 한병으로 회복된 터, 난 흔쾌히 수락하고 저녁 때 그를 만났다. 거기서 우린 소주 네병을 비웠는데, “쌓인 게 많다”던 그는 정작 나를 만났을 땐 순전 이승엽이 얘기만 했다.
4병째를 거의 비웠을 무렵, 사촌형한테 전화가 왔다.
“너 지금 어디서 마시냐?”
내가 이틀 전에 보낸 문자 메시지를 이제야 봤단다. ‘요즘 통 연락도 안하시고, 저를 잊으신 것 같아 슬픕니다’
사촌형은 지금 양재동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고, 그쪽으로 오라고 한다.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오늘 같으면 아무리 마셔도 안취할 것 같은 그런 느낌. 갔더니 사촌형은 회사 직원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난 거기 껴서 맥주를 4병 가량 마셨다. 그 다음 차는 사촌형과 나의 독대, 난 부자인 사촌형이 사준 비싼 양주를 열나게 마셨다. 우리 둘이서 양주 두병을 비웠다니 내가 생각해도 놀랍다. 사촌형이야 워낙 술을 잘마시니 그렇다 쳐도 이미 전작을 하고 간 내가 어떻게 그리 많은 술을 마실 수 있었을까?
내가 마신 술은 다음과 같다.
대낮에 처음처럼 한병<--이건 몸이 안좋다며, 나 혼자 홀짝홀짝 비웠다.
친구랑 처음처럼 두병씩.
사촌형과 맥주 4병+1병(3차에서)
사촌형과 양주 한병씩
내 몸 어디에 이토록 많은 알콜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배를 보니 이 의문이 풀린다). 그 다음날 약간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날 일을 생각하면 뿌듯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