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에 나온 내용을 조금 인용하자면, 북극곰의 흰 털은 두가지 유전자가 각자의 역할을 한 결과다. 그 유전자가 특별히 선택되어 널리 퍼진 이유는 북극이란 곳이 워낙 추우니 따스한 털이 필요했고, 눈의 색깔이 하야니 포식자나 피식자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하얀색이 적당했기 때문이다. 울창한 숲에서 얼쩡거리는 북극곰을 생각해보라. 많이 이상하지 않는가? 그런 곳에서는 북극곰같은 유전자를 가진 동물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내 친구 하나가 장모 댁에 생선을 넣어두러 갔다가 무지하게 놀란 적이 있다. 일반 냉장고는 꽉 찼다고 김치냉장고에 넣으라고 장모가 말했는데, 김치냉장고 역시 엄청나게 더러웠다는 거다. 친구는 “정말 공포스러웠어.”라고 그때의 경험을 얘기한다.
“안먹은 음식들이 잔뜩 썩어 있는 거야. 냄새가 말도 못해.”
어디 냉장고만 그러겠는가? 이걸로 보아 장모에게는 게으른 유전자가 아주 잘 작동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유전자는 고스란히 친구 아내에게 전해져, 그녀 역시 잠 많고 집에서 손도 까닥 안하며 산다.
여기서 다시 도킨스의 진리를 언급해 보자. 우리나라에서 집안일은 언제나 여자의 몫이었다. 집안일이란 건 해도해도 티가 안나는 지루한 허드렛일, 사람이 게으르냐 아니냐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건 집안이 더럽냐 깨끗하냐다. 즉 우리나라 같은 환경에서 게으른 유전자를 가진 여자가 선택되어 널리 퍼지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으른 유전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사람이 또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유전자는 다름아닌 가정적인 남자를 고를 수 있는 것, 장모가 그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살았듯이, 친구의 아내 역시 집에서 손 하나 까닥 안하고 살 수 있는 거다. 착각하면 안되는 건 유전자가 독립적 단위이며, 서로에 대한 보완적 기능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그러니 게으른 유전자만 가지고 있는 여자는 아주 힘든 삶을 살아야 했을테고, 둘 다 가진 사람만 인생이 편했다.
안타까운 건 내 친구. 부지런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니 집안일을 다 하는 것에 불만은 없지만, 친구의 아내가 역시 장모한테서 물려받은 잔소리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지라 일 할 걸 다 하면서도 늘 구박만 받는다는 거다. 우유병 씻는 게 힘들다고 우유병 좀 몇 개 더 사자고 했다가 “돈 좀 아끼라”는 핀잔을 받은 적이 있고, 늦게 들어오면 그렇게 야단을 친다나. 그거 말고도 사생활에 대한 간섭이 아주 심해 마음고생이 많은데,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친구에게 그런 잔소리를 견디는 유전자가 발달을 해 화 한번 안내고 잘 참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과연 그 유전자를 어디서 받은 걸까? 설마 장인에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