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의 월드컵은 오늘부터 시작이다. 한국 팀의 탈락은 분명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부터 담담한 마음으로 16강 토너먼트를 즐길 수 있다고 위안하련다. 48경기가 치러지는 동안 한국전 포함해서 단 두경기만 보며 체력을 비축했으니, 3-4위전을 빼고 13경기를 보는 건 일도 아닌 걸로 보인다. 그나저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잠이 들어야 12시에 깰 텐데, 계속 글만 쓰고 있다.


‘비열한 거리’

시인이란 좀 특별한 사람인 줄 알았다. 광야에서 초인의 목소리를 듣는 등, 우리와는 감수성도 틀리고 언어도 완전히 다른 그런 사람인 줄 알았었다. 내가 이름을 아는 몇 안 되는 시인인 유하가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조금 뜬금없다고 생각한 건 그 때문이다. 시와 달리 영화는 나같이 문학적 소양이 일천한 사람과 대화하는 장르이므로. 그의 베스트셀러 시집과 제목을 같이한 데뷔작이 망한 건, 그래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불륜을 소재로 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화려하게 성공하고, 학교 내 폭력을 다룬 <말죽거리 잔혹사>로 대박을 터뜨린다. 그 두편을 모두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좀 의아했다. 불륜과 폭력이라, 무슨 시인이 그래? 하지만 그는 한술 더 뜬다. 말죽거리에선 폭력이 학교 내로 국한되었다면, <비열한 거리>에선 폭력이 거리로 나온다. 폭력과 시가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가 없기에, 이렇게 정리하고 말았다. 유하는 영화를 정말 재미있게 잘 만드는 몇 안 되는 감독이고, 그는 폭력과 불륜에 조예가 있다,고.


 

140분이면 2시간 20분,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 동안 난 한번도 지루해본 적이 없다. 많은 배신을 봐와서 웬만한 배신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나인데, 이 영화에 나오는 배신은 내 상상을 뛰어넘는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어떤 이가 이런다.

“저렇게 배신에 배신을 때리면서 어떻게 살아?”

하지만 꼭 조폭만 살기 힘든 건 아니다. 그들의 배신이 눈에 띄게 드러나서 그렇지, 우리 인간들이 사는 사회라는 곳이 온갖 배신과 권모술수로 점철되어 있지 않는가. 지금까지 내가 저질렀던 배신만 대충 헤아려도 이십번이 넘는다. 난 우정을, 사랑을, 스승을 배신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배신을 당해가며 오늘날까지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 복잡한 인간사의 단면을 명쾌하게 그려내는 것, 조폭 영화가 인기가 있다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평소 좋아하지 않았던 조인성의 열연에 박수를 보내며, 유하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려 본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태우스 2006-06-24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주 참 열심히 했습니다만, 아직 42위군요. 내일은 글을 못쓸 것 같은데, 아깝다...30위...

기인 2006-06-2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유하 시인, 유하 감독 좋아해요. :) 말죽거리 잔혹사는, 일종의 알레고리로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깡패가 지배하는 70~80년대 학교의 군대화, 그것이 바로 일상의 군대화라는 80년대로 읽혔어요. 학교=군대=나라 라는 도식이 성립했던 암울했던 공간. '대한민국 학교 다 좆까라 그래'라는 권상우. 80년대 우리도 그만한 힘이 있었으면, 학창시절 그만한 힘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 등. 호호;;
저에게 권상우 같은 몸이 있었으면;;;; 하기도 하면서. (ㅎㅎ 저에게는 한가인보다 더 이쁜 애인이 있지만 <-어디선가 검열중;; )
저도 비열한 거리 보러가려고요. 기대되요 ;)

연우주 2006-06-24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유하의 영화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시는 참 세련되었더군요. 촌스런 용어긴 하지만, 모던하다, 라는 말이 적절해요. 음.. 뭐 유하의 영화도 세련되긴 했죠. 거의 액션(?) 영화라고 부를 만한 영화를 세련되었다고 말하긴 좀 우습지만.

2006-06-24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6-06-24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이거 보러 갈 건데...
이거 보면 제게 이 영화는 최초로 극장에서 보는 유하 감독의 영화가 될 거예요.

LAYLA 2006-06-25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벌에 버닝하고 있어요.

마태우스 2006-06-26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라님/땡벌에 버닝하다...영화 속의 한장면이지요?^^
하루님/영화를 참 잘 만들더군요. 마음에 들었어요.
속삭이신 분/오오 펫코 파크! 그렇게 해주시면 제가 후하게 곱창 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보라빛우주님/저랑만 코드가 맞는 거죠 뭐. 글구 액션도 세련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게 있지 않을까요??
기인님/사실제가 님을 부러워한 건 체중 때문이었는데 부러운 게하나 더 늘었군요. 그래도 호감을 갖고 있는 탤런트가 한가인이랍니다^^

moonnight 2006-06-2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보면서 무지 가슴아프더군요. 사는 게 이런 건가. 싶어서 허탈하기도 하구요. 음악도 잘 어울리고, 조인성. 참 연기 잘하죠? 조연들도 다 너무 훌륭하구. 우리영화 너무 재미있어요. >.<

모1 2006-06-26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결혼은 미친짓이다만 보았는데....너무나도 쿨함에..놀랐습니다. 누군가는 그러더군요. 명작이라고....그런데 전 사실 좀 불편했던 영화~~안 들키면 된다는 엄정화의 그 뻔뻔함이 좀..그래서요.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감독인것은 아는데...그래도 전 재밌는 영화를 좋아해서리..후후..

마태우스 2006-06-28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잘 안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건 참 잘된 영화였죠. 엄정화의 연기가 빛이 났지만요.
달밤님/그러게 말입니다. 월드컵만 아니면 더 많은 관객이 들었을텐데... 요즘 달밤님이 알라딘에 애정이 식은 거 같아 맘이 아파요...

나막신 2006-06-29 0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면서 초반의 싸움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렇게 리얼한 액션장면은 영화에서 보기 힘든데, 눈도 제대로 못뜨고 귀도 막고 봤을정도예요. 보통은 액션신은 멋지고, 만화같은데 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