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번째

일시: 6월 10일(토)


벤지의 기일이었다. 혼자 술을 마시려다 너무 처량해 보일 것 같아 베스트프렌드에게 연락을 했다.

“나랑 술 좀 마셔주면 안 돼?”

“그러자.”

낮 동안 되도록 벤지 생각을 안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문득문득 솟아나는 벤지 생각마저 억누를 수는 없었다. 맨 정신에 있는 게 힘이 들어, 술마실 시간이 왜 안오나 그것만 기다렸다. 밖을 보니 비가 내린다. 작년 오늘보다 훨씬 더 많이. 문자 메시지가 왔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란다. 고마웠다. <가족의 탄생>의 메시지처럼, 때로는 피를 나눈 가족보다 이렇게 저렇게 맺어진 인연이 더 소중할 수 있다.


비가 오는데도 착한 그 친구는 우리집 근처까지 와줬다. 그와 마시는 술은 포근했다.

“아, 오늘이 그날이구나.”

“개한테 무슨 기일?”이라고 날 비웃는 대부분의 친구들과 달리, 몰랐다고 말하는 그 친구가 고맙게 느껴졌다. 최소한 그는, 벤지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안다.


요즘 ‘처음처럼’을 시키는 경우가 늘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참이슬이 있는 서재’란 이름을 바꾸라고 한다. 그날 역시 ‘처음처럼’을 마셨다. 어머니가 여행을 가서 돌아오지 않았기에 할머니가 저녁을 어찌 드실지 걱정된다고 했더니 친구가 우리집에 가서 술을 마시잔다. 역시나 고마운 친구다. 그 덕분에 할머니는 간단히 요기를 하셨다. 친구가 간 뒤 소주 한병을 더 마시며 벤지의 넋을 위로하다 정신을 잃었다. 벤지의 첫 기일은 그렇게 갔다.


70번째:

일시: 6월 11일(일)

마신 양: 소주 두병


택시를 타고 친구집에 가는데, 기사 아저씨가 전화통화를 한다.

“5만원짜리 두방을 맞아서 요즘 아주 죽겠어.”

전화를 끊자 물었다.

“딱지 떼셨어요?”

“아니요. 친구 아들이 두명이나 결혼했어요.”


나 역시 그날 두방을 맞았다. 후배 하나가 결혼을 했고, 오후에는 동료 선생님의 모친상에 가야 했다 (월요일에도 모친상이 하나 더 있었으니 사실은 세 방이다). 영안실이 천안이라 간 김에 술을 먹고 거기서 잘 생각을 했다. 학교에서 사귄 유이한 친구 하나한테 전화했다.

“뭐 해?”

“어머니가 닭 날개 해주셔서 맥주랑 먹으려고. 올래?”

난 택시를 타고 친구 집에 날아갔고, 닭 날개를 안주삼아 소주 두병을 비웠다. 개를 좋아하는 그는 집에서 마르치스를 키운다. 우리 벤지와 같은 종류지만, 몸이 더 크다. 날 제외한 집안 식구는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 벤지와 달리 그 개는 처음 보는 날 잘 따랐다. 미역국에 들어 있는 고기와 닭날개의 살을 미역국에 씻어서 개-이름이 뭉실이다-한테 줬다. 나중에 그 개는 내 무릎에 안겨서 잠이 들기도 했다. 그 개를 보고 있노라니 벤지 생각이 많이 났다. 하지만 그날 꿈에 벤지는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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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6-13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제 지인의 이야깁니다만..한 번은 콜리가 죽도록 아픈 적이 있었대요. 밤새도록 열나고, 설사하고, 토하는데 아예 자신이 돌아버리겠다고(욕이라곤 모르는데 딱 이 말을 쓰더군요). 차라리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아직 다행히도 콜리는 잘 지내는데, 그 존재감이란 것이 참 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보고싶은 마음이 옅어지지는 않을 거에요. 단지, 보고 싶은 마음이 지속되는 그것에 익숙해지겠지요. 토닥토닥.

stella.K 2006-06-13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1주기였군요. 너무 외로워하지 마셔요. 힘내십쇼.

마태우스 2006-06-13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맞아요 차라리 제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들지요... 그 존재감은 정말 크지요. 개라는 이유로 "개가 뭐 기일이냐"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이유지요... 하지만 그들을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아요...

마태우스 2006-06-13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앗 오랜만에 뵙네요 반갑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계셔서요..

Arch 2006-06-1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문득 마태우스님의 외로움이 느껴지네요.

비로그인 2006-06-13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벤지도 님이 보고플꺼에요.

전호인 2006-06-13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사랑도 있었네여. 둘이였다가 하나가 되본 사람은 허전함을 느낄 것 같습니다.

2006-06-13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리스 2006-06-13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원희가 예전에 쇠고기를 먹고 급체한적이 있었어요. 황급히 동물병원에 갔는데 그 여린 발목에 털을 밀고 제 발만한 주사기로 찌르고, 목덜미에 또 주사 놓고, 또 놓고.. 그러고 있는데 저더러 원희를 꼬옥 잡고 있으라 하더군요.

그 조그만 아이한테 놓아지는 거대한 주사기 때문에 저는 식은땀이 나고 주변이 뱅뱅 돌더군요. 하지만 제가 원희를 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겨우 버텼습니다. 착하게 말 잘듣던 원희와 달리 형편없는 주인인 저는, 모든 응급처치가 끝나자마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원희는 아파서 다 죽어가는 와중에 보호자인 저는 주사가 놓아지는게 너무 무서워서 눈앞이 하야지다니.. 여하튼 그때 제가 까무라치지 않은게 다행이지요.. 휴....

검둥개 2006-06-14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까이 살면 해리를 빌려드릴텐데, 아쉬움이 커요...
힘내세요.

하루(春) 2006-06-14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처럼 별로라고 하시더니...

rainy 2006-06-14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란 건 그런 것 같아요. '너에게 그것(동물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등등)이 어떤 의미인 줄 알아주는 사람' . 마태우스님의 글은 자주 보고 있지만 인사 드릴 기회는 좀처럼 없었는데, 위로는 많을 수록 좋지 않을까.. 싶어 글을 남깁니다 ^^

야옹이형 2006-06-14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rainy님과 같은 취지입니다요. 마태우스님 힘내세요. 벤지도 하늘에서 화이팅! 깡총깡총!

하늘바람 2006-06-14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 좋은 데 갔을 거예요. 그런데 마태님이 잘가라 내동생이란 동화책을 읽어보시면 좋을 거같아요. 그럼 벤지의 맘을 조금 이해하시지 않을까요

비로그인 2006-06-14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에게 행복한 삶을 주셨어요 벤지는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강아지로 살았잖아요! 마태우스님 너무 아파하지 마시고 기억해주세요...따뜻한 기억으로. 벤지가 마태우스님을 그렇게 기억하듯이

Mephistopheles 2006-06-14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한 곳에 갔으니까 아빠 꿈에도 안나오는 것이겠죠..^^

모1 2006-06-14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벤지녀석 실제로본적은 없지만..하여튼 복받은 녀석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멋진(?) 녀석을 만났던 마태우스님도 복받으셨구요.

마태우스 2006-06-1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제가 더 복을 받은 거죠... 6월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메피님/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할래요
고양이 딥님/같이 못있어 준 게 맘에 걸려요. 있을 때 잘하란 말이 요즘처럼 절실하게 느껴질 때가 없네요. 맨날 술먹으면서 밖으로돌았었죠
하늘바람님/벤지의 아름다운 맘을 제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추천해주신 책, 한번 읽어보도록 할께요
야옹이형님/죽은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요...그땐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영어 쓰면 어쩌지...
레이니님/이 글을 계기로 인사를 나누는군요. 맘이 허전할 때 해주신 위로, 정말 감사합니다.
하루님/처음엔 그랬는데요 요즘엔 점점 그게 땡겨요... 지조가 없어 하여간...
낡은구두님/그 심정 저도 이해해요...벤지가 아파가지고 방석 위에서 잘 때 진짜 마음이 아프죠...
속삭이신 분/죄송하지만 한 일주일 전쯤에 연락 주시면 좋겠어요^^
전호인님/둘이 있다가 하나가 된 심정이란... 집이 갑자기 넓어 보이는 게 아닐까요.
토끼님/소외의 외로움은 인간관계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늘 주장하지만, 벤지를 대체할 만한 사람은 없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