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난 여관방에서 메이져대회인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를 보고 있었다. 그냥 본 것만은 아니다. 한국 선수가 나오면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고, 경쟁자들이 퍼팅을 할 땐 손가락 두 개를 모아 저주의 빔을 쐈다. 캐리 웹이 막판 짧은 버디퍼팅을 연달아 놓친 건 저주의 빔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으리라.




내 방해로 인해 8언더파에 그친 캐리 웹은 경기가 끝난 후 TV를 보면서 두꺼운 빵을 먹었다. 선두인 박세리와는 1타 차이, 박세리가 마지막 홀에서 실수를 한다면 캐리 웹은 연장전에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혹시나’ 하는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맞아 떨어져, 18번 홀에서 박세리가 친 공은 홀컵을 한참 지나친 뒤에야 멈췄다. 그 이후 TV에서는 수시로 캐리 웹을 보여줬는데, 그녀는 눈을 TV에 고정시킨 채 계속 빵을 먹었다. 모르긴 해도 웹은 그 빵을 다 먹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을 거다. 그녀가 빵을 먹는 동안 박세리는 4번째 공을 홀컵에 넣지 못했다. 연장전. 

98년 우승당시 모습.


타이거 우즈처럼 연장전에서 거의 지지 않는 박세리는 길게 끌 것도 없이 연장 첫 번째 홀에서 끝을 냈다. 두 번째 샷이 기가 막히게 홀컵 가까이 붙은 것. 골프를 전혀 못치는 나도 넣을 수 있을 만큼 짧은 거리였다. 반면 캐리 웹의 두 번째 샷은 홀컵에서 멀리 떨어진, 결코 버디 잡기가 쉽지 않은 위치에 떨어졌다. 웹의 버디 퍼팅은 빗나갔고, 박세리는 아주 쉽게 공을 홀컵에 떨어뜨렸다.


1999년 어느 월요일 새벽, 그때 난 브리티쉬 오픈 마지막 라운드를 보고 있었다. 17번 홀까지의 경기가 끝났을 때, 난 출근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1등을 달리던 프랑스의 반 드 벨드(이하 벨드)가 2위와 세타 차이였기에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우승자가 가려졌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벨드가 친 첫 번째 공은 어이없게도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난 다시금 TV 앞에 앉았다. 벨드가 두 번째로 친 공이 냇물에 빠지자 2등으로 경기를 마친 스코틀랜드의 폴 로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퍼팅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벨드는 그 다음 샷마저 실수를 하는 등 프로 선수로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트리플 보기를 범하고 만다. 저스틴 레너드, 벨드, 그리고 폴 로리가 벌인 연장전의 승자는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폴 로리였다.

폴 로리의 모습


캐리 웹의 패배가 오로지 빵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건 물론 아니다. 박세리의 두 번째 샷은 정말 훌륭했고, 연장전이란 긴박한 상황에서 그런 공을 칠 수 있다는 건 우승 자격이 충분하단 얘기다. 하지만 뭔가를 잔뜩 먹고 러닝머신을 하면 속이 영 거북해 달리기 힘든 것처럼, 두꺼운 빵을 먹고 멋진 샷을 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빵만 안 먹었던들 박세리의 것보다는 못할지라도 버디를 잡을 위치로 공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골프에서 한 타는 언제라도 극복될 수 있는 차이다. 18번 홀의 난이도로 보아 박세리가 보기를 범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으니, 캐리 웹은 그 빵을 먹는 대신 연장전을 상상하며 TV를 보는 게 옳았다. 캐리 웹은, 빵을 너무 일찍 먹었다.

이 정도까진 아니지만 꽤 큰 빵이었다.


* 어찌되었건 박세리가 간만에 부활한 건 정말 기분 좋은 소식이다.

** 박세리가 18번 홀에서 보기를 범하자 허탈한 나머지 자리에 누워 버렸는데, 내가 기도를 안 해줬다고 안시현이 공을 물에 빠뜨린다. 우리 선수들은 너무 나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크다.

***캐리 웹은 박세리와 세 번 연장전을 벌여 모두 졌다. 그 전에도 웹이 빵을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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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6-1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오늘 점심은 특제 샌드위치를 먹어야할까요?

하이드 2006-06-1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간만에 정말 웃기는 페이퍼였습니다. 짝짝짝

건우와 연우 2006-06-12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선수들은 나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크다 ㅎㅎㅎ

Mephistopheles 2006-06-1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합니다. 캐리 웹이 저 빵에 곁들여 마신 사이다에 미원 타라고 시킨게 접니다..

해적오리 2006-06-1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의 멋진 페이퍼에 메피스토님께서 맛난 양념까지 쳐주셨네요. ㅋㅋㅋ
마태님 축구 경기 보면서도 같은 포스를 유지해주시길 바래요.

프레이야 2006-06-12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구에서도 마태님의 주술이 수리수리~

물만두 2006-06-12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님의 지원덕에 이겼으니 뭐라도 있을까요^^

하루(春) 2006-06-1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빵을 너무 일찍 먹었다. ㅋㅋㅋ~ 맛있어 보여요. 호밀빵 같군요.

sooninara 2006-06-12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마태님 앞으로도 열심히 빔을 쏘아주세요.

Mephistopheles 2006-06-1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레이저를 쏘셨을 꺼라 생각됩니다만....??

호랑녀 2006-06-12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안시현 선수에게 사과하셔야겠네요.
한국선수가 박세리만 있는 게 아닌데, 어찌 자리에 누우셨단 말씀입니까? =3=3=3

모1 2006-06-12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큰 빵이길래...궁금하기까지...후후...요즘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정말 잘 나가는군요. 얼마전에 신문에서인가 지금까지 lpga모든 투어에서 1등과 2등을 쓸고 있다고 났던 것 같은데..

마태우스 2006-06-1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매우 큰 빵이지요^^ 지금 한국 여자골프는 한두명이 잘하는 게 아니라, 정상권에 십여명의 선수가 포진해 있어서 그 상승세가 지속되리라 생각됩니다^^'
호랑녀님/그러게 말입니다. 변명하자면 저도 인간이고, 에네르기를 너무 쓰다가 지쳐서요....
메피님/어머 제가 원하는 바로 그 사진!! 님의 센스에 추천하는 바입니다.
수니님/열심히 하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하루님/캐리 웹도 맛있게 먹더군요^^
물만두님/만달러만 주면 좋겠는데, 몰라줘도 화내지 않아야 군자겠지요^^
배혜경님/축구는요 빔 쏘기가 좀 그래요. 공격권이 수시로 바뀌고, 90분 내내 쭈그리고 앉아 빔을 쏘는 게 어렵거든요... 그래도 해볼꼐요
해적님/음, 축구에서 빔을 쏘려면 술이 좀 필요한데... 술 사주실 건가요?^^
메피님/아니되어요 그런 식으로 제 공을 가로채려 하다니요^^
새벽별님/어마 전 그렇게 위대한 사람은 아니어요. 배고프게 할 능력은 없답니다^^
건우와 연우님/제가요 박세리 신화를 만든 사람이랍니다^^
하이드님/님의 칭찬을 받으니 기쁘기 그지없네요^^
조선인님/일하기 전에 빵먹지 말라는 게 제 메시지였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