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부터 쓰는 건 제 얘기가 아닙니다. 다른 대학에 근무하는 선배가 말해준 걸 제가 경험한 것처럼 쓴 것에 불과하니, 그대로 믿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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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B 대학의 박사학위 심사장, 심사대상인 여자 선생이 초조하게 앉아 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심사위원 한분이 위원장에게 말한다.
“이 선생 남편 되는 분도 우리 교실에서 학위를 했습니다.”
하지만 위원장의 다음 말에 분위기는 더 썰렁해졌다.
“그 사람, 예의가 없어. 박사 따고나서 코빼기도 안보여!”
얼핏 보면 학위를 따고 한번도 인사를 안온 그 사람이 나빠 보인다. 과연 그럴까.
2. 대학원
의대의 박사 제도는 참으로 이상한 제도다. 전문의 제도가 있으니 굳이 박사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도 박사학위가 없으면 조교수 이상 승진이 안되니 대학에 남을 사람은 박사를 한다. 그리고 개업을 할 사람도 박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왜? 학위증을 병원에 걸어두면 환자들에게 더 신뢰가 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요자가 많으니 박사를 하려면 오래 기다려야 하고, 기다리는 게 싫은 사람은 전공과 무관한 기초의학 교실에서 학위를 하기도 한다. 강남에서 날리고 있는 원진성형외과(가칭)의 원장이 우리 교실에서 학위를 한 것도 그런 이유다.
기초의학교실이라고 해서 안기다리는 건 아니다. 박사를 하려면 석사를 마치고 나서도 최소한 3-5년은 기다려야 하므로 그들은 석. 박사에 입학하기 위해서, 그리고 입학 후에는 졸업하기 위해 해당 교수에게 갖은 충성을 다한다. 의사이긴 하지만 해당 전공에 지식과 기술이 없는지라 학위 실험은 교실 조교들에게 맡겨야 하고, 등록금 외에 실험비 명목으로 돈을 낸다. 그 실험비는 십년 전에 이미 천만원을 넘었다. 그뿐이 아니다. 대학원생들은 갖은 명목으로 돈을 내야 한다. 회식비는 물론이고 교수가 외국을 갈 때, 교실 행사를 할 때 등등 돈을 낼 기회는 많다. 심지어 모 교수는-내 지도교수는 그렇지 않지만-팩스나 복사기 등의 물품을 대학원생들이 사도록 한다. 12대 4의 경쟁을 뚫고 들어온 한 선생은 과에서 쓸 컴퓨터 구입비를 못내겠다고 했다가 “제 때 학위 나가기 힘들 것”이라는 협박을 들어야 했다 (결국은 냈다). 병원에서는 다들 과장이고 원장이지만, “노래 한번 해봐라”는 말에 할 수 없이 못부르는 노래를 부르는 그들, 갖은 수모를 견뎌가면서 생각을 한다.
“박사만 따 봐라. 절대로 안온다.”
학위 심사를 할 때면 그들은 또다시 놀란다. 돈을 낸 것에 비해 논문의 수준이 영 떨어졌기 때문. DNA나 항체를 이용한 멋진 연구가 대세인데, 그 교실은 기껏 한다는 게 주민들 대변검사다. 다른 사람이 대신 실험해준 걸 알고 있지만, 심사 위원장은 “논문이 이게 뭐냐?”고 학위생을 야단친다. 4번의 심사 동안 삐까번쩍한 식사를 대접해야 하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수백만원의 심사비를 내는 것도 부담스럽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먼저 낸 돈에 그런 게 다 포함되었다고 생각한 학위생 한명은 “심사비를 못내겠다.”고 버티다가 그분 말씀에 의하면 “학위 못나갈 뻔”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이러니 학위를 딴 뒤 왜 찾아오겠는가. 연말이면 동문회를 한다고 연락을 해보지만, 잘 보여야 하는 현역 대학원생만 나오지 졸업생은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언젠가 졸업생이 한명도 안오던 날, 그 과의 주임교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끼리만 하자. 나오기 싫다는데 억지로 부를 거 없지.”
그 대학원생들 역시 교수님의 제자이건만, 가까이서 보면서도 존경심을 잃지 않을 교수는 그리 많지 않다.
3. 늘 우려먹는 C 교수님
지금은 재벌학교에 근무하시는 C 교수님은 SCI에 등재된 몇 안되는 잡지인 KMS의 편집장이시다. 재벌학교에 오시기 전, C 교수 역시 전공자가 아닌 학위생을 받았다. 하지만 이 선생님은 학위생들에게 실험비 말고는 일체 돈을 요구하지 않았고, 논문도 외국 유명잡지에 실릴만큼 훌륭하니 돈이 아깝지도 않다. 일체의 향응을 거절하시니 학위생들끼리 모이면 “언제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얘기했단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 소박한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학위를 받아야 했다. 다른 대학에서 학위를 하는 동료들의 얘길 들으면서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좋은 선생을 만났는지 깨닫는다. 단지 학위를 매개로 만났을지라도 참다운 교수가 어떤 건지 보여준 C 교수에게 학위생들은 박사를 딴 뒤 더 자주 찾아뵙는다. 설이면 세배를 가고, 스승의 날에도 선물을 잊지 않는다. C 교수는 화를 내며 돌려보내지만, 그럴수록 더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유명잡지에 논문을 싣고 받은 상금도 연구비로 쓰고, 학교에서 월급을 주는 비서 대신 연구원을 고용한 채 커피 접대도 스스로 하시는 C 교수님은 우리 학회에서보다 다른 학회에서 더 존경받는다.
4. 스승의 날
5월 15일부터 시작해 사흘간, 난 술을 마셔야 했다. 그 얘기를 해본다.
1) 첫날: 5월 15일
선물을 사들고 지도교수를 찾아뵙는 날, 난 사소한 일로 열이 받아 1차를 안갔다. 그 대신 동네 친구를 불러내 곱창을 안주로 소주를 세병이나 마셨고, 그것도 모자라 2차에서 맥주 2천을 마셨다.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지도교수 모임의 2차에 합류하자마자 난 깊은 후회를 했다. 내가 왔다고 좋아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여서. 삐질만한 일이 있을지라도 일찍 와서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렸어야 했다는 걸 그제야 깨닫게 된다. 인사 관리를 잘 못해서 모교의 위상을 추락시켰고, 나로 하여금 모교에 발을 끊게 만든 가장 큰 책임은 분명 선생님한테 있지만,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어깨도 처진 선생님을 어찌 미워할 수가 있겠는가. 난 선생님과 몇 곡의 노래를 불렀고, 10시 반도 안되어 파장을 했다. 애들이 다 집에 간 뒤 친구와 난 감자탕집에 가서 소주 두병을 더 마시면서 모교 얘기를 했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좋은 얘긴 아니었다.
2) 둘째날: 5월 16일 (이제부턴 저 잘났다는 글입니다. 심장이 약하신 분은 건너뛰어 주시길)
“서선생이 적임자야!”란 학장 말 때문에 의사고시에 떨어진 학생들을 지도한 적이 있다. 90% 이상이 합격을 하는지라 의사고시에서 낙방하는 건 해당 학생에게 엄청난 좌절감을 안겨준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바로 자신감의 회복일 터, 난 공부 얘기를 한마디도 안한 채 술만 먹였다. 살 쪘다고 고민하는 사람에게 “살을 빼라”고 하는 건 잔인한 거니까. 마포의 주물럭집, 강남의 고깃집, 대학로의 횟집, 낙산가든 갈비, 모 중국집 등등이 그들과의 추억이 어린 장소다. 그들은 날 믿었고, 나도 그들을 신뢰했다.
내 기대대로 그들은 이듬해 의사고시에 붙었다는 소식을 전화로 알려왔고-“선생님 얼굴이 가장 먼저 생각났어요.”-며칠 뒤 지도학생으로서 마지막이 될 술자리를 강남에서 가졌다. 눈이 펑펑 쏟아졌던 그날을 나도, 그들도 잊지 못한다. 강남에서 고기를 먹고 양재동 Bar에 가서 스카치블루를 먹었다. 전에도 얘기한 바 있지만 쌓인 눈을 뭉쳐서 눈싸움을 하던 기억은 내게도 아름다운 추억이다. 남자 셋이 하는 눈싸움이 그렇게 멋진지 미처 몰랐었다.
그들은 우리 병원에 들어갔고, 지금은 어엿한 레지던트 2년차다. “못찾아뵈서 죄송하다.”는 연락이 올 때마다 난 “괜찮다.”고 말하곤 한다. 누군가가 잘 자라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그들을 통해 깨달았으니까. 2년차라 시간이 났는지 이번 스승의 날을 겸해서 보자고 연락이 왔다. 난 기쁜 마음으로 응했다. 흰 까운을 벗어도 이젠 의사 티가 줄줄 났다. 그 중 한명은 멋진 애인까지 동반하고 왔다. 맛있는 회를 파는 데가 있다고, 예약까지 해놓았단다. 자기들 딴에는 대접한다고 마련한 자리지만, 몰래 나가서 계산을 해버렸다.
“아니 선생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는 그들의 모습이,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귀엽게 느껴진다.
선물이라며 그 귀한 발렌타인을 내놓는다. 30년산을 100만원에 판다고 들었는데, 그들이 준 건 세상에, 47년산이다. 소주 세병을 마시고 한병을 더 시키려는 걸 말리고 발렌타인 뚜껑을 열었다.
“그건 댁에서 드셔야죠.”
“전 집에서 술 안먹어요. 그리고 비싼 술 마셔야 내일 뒤끝이 없죠.”
9시, 얼큰하게 취한 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5월 16일, 날짜는 안좋지만 그들도, 나도 충분히 즐거운 하루였다.
3) 셋째날: 5월 17일
스승의 날 점심시간에 지도학생 다섯명이 들이닥쳤다. 선물로 유명 메이커의 멋진 상의를 건낸다. 그리고는 곧바로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부른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은혜...”
생일축하를 여럿이 부를 때 부르는 사람은 재미있지만, 당사자는 영 쑥스럽다. 스승의 은혜 노래는 그보다 더 쑥스럽다. 내 방이라 듣는 사람이 없다 해도 말이다. 사실 내가 그들에게 해주는 거라곤, 다른 선생님들보다 조금 비싼 음식과 술을 사준다는 거 말고는 없다.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지만, 그리고 가끔은 궁금하지만 묻지 않는다. 내가 아니어도 공부하란 말을 해줄 사람은 세고 셌으니까.
난 그저 술만 먹인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 이름대기 해서 진 사람, 농담을 했는데 아무도 못웃긴 사람에게. 그래도 그들은 날 좋아하고, 나도 그들을 좋아한다.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무척 반가워해주고, 멀리서 보고 달려와 아는 체를 하기도 한다. 가끔 술자리에서 “형!”이라고 했다가 “죄송하다.”고도 하는데, 난 그들이 사석에선 “형”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얼마 전에 만났으니 오늘은 간단히 식사나 하자.”고 했지만, 술에 굶주린 20대니 오늘도 조금은 달릴 것이다. 게다가 난 가방 안에 전에 걔네들한테서 받은, 하지만 반밖에 못먹은 양주를 담아 두었다.
5. 전망
C교수처럼 탁월한 연구를 하고, 오직 연구밖에 모르는 삶으로 존경받는 건 내겐 이미 불가능한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선생의 길이 꼭 그것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고, 난 그 잘하는 걸 하고 있다. 취미로 마시기 시작한 술이 좋은 스승의 길이 될 수 있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난 오늘도 술을 마시러 간다. 이럇!
* 참, 발렌타인 47년산 말이죠, 그거 조작입니다. 원래 17년산인데 제가 플러스펜으로 47을 만들었답니다. 많이 놀라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