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4월8일(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플을 만나던 날, 난 농구장에 가서 삼성과 오리온스의 경기를 봤다. KCC를 응원하는지라 누가 이기든 별 상관이 없었기에, 가끔씩 등장하는 치어리더들과 내 오른쪽 앞자리에 앉은, 치어리더보다 더 예쁘고 늘씬한 미녀만 바라봤다. 


농구가 끝난 건 오후 4시,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약간 남았기에 찜질방에 갈까 하다가, 그날이 프로야구 개막전인 걸 깨닫고 표 없이 슥 들어가 볼 생각을 했다. 원래 7회쯤 되면 표 검사하는 사람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날따라 야구는 두시가 아니라 4시에 시작됐고, 깍두기처럼 생긴 남자가 버티고 선 채 표 검사를 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할 수 없이 표를 사가지고 내야 위쪽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보려던 건 야구였지만 그보다 더 인상깊게 본 건 황사였다. 내 생애에서 경험한 가장 대단한 황사. 늘 보이던 건물은 형체조차 보이지 않았고, 목이 아프고 눈이 따가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와 내 친구를 제외하곤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그런 것도 없이 앉아 있는 게 힘이 들어 3회말이 끝났을 때, 아쉽지만 경기장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6시 반, 우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플과 마주앉았다. 1차에서 소주를 각각 한병씩 마셨고, 2차로 오뎅바를 갔다.

여자분이 술을 시킨다. “백세주 주세요.”

술은 술다워야 한다고 믿는 난 13도밖에 안되는 백세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주도 한병 주세요.”라고 했는데, 그게 와전이 되어 소주와 백세주를 섞은 50세주가 만들어져 나왔다. 밤이 늦도록 정다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오십세주를 마셨다. 언제나처럼 잠이 들었고, 집에 도착한 건 새벽 1시 반이 지나서였다.


전날 뭘 하든지 오뚝이처럼 일어나 테니스를 쳤던 나, 하지만 오늘만큼은 계속 정신이 몽롱해 테니스가 잘 안됐다. 불가능한 공을 달려가서 잡아내던 순발력도 오늘만큼은 발휘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어지러워서 ‘이러다 쓰러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세 게임을 조지고 난 뒤 왜 이리 뒤끝이 안좋은지 알 수 있었다. 소주 대신 오십세주를 먹은 게 바로 그 이유, 결국 난 오늘 꼴등을 했다. 역시나 술은 섞어마시면 안된다.


자, 이제 그 커플이 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플인지 설명하겠다. 주량이 남녀 합쳐서 소주 일곱병은 족히 된다는 점, 여자분이 미모와 귀염성을, 남자분이 유머와 더불어 넉넉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 더 중요한 이유로 그 두분이 오랜 시련을 극복하고 다시 만났다는 점, 그리고 내가 그 두분을 정말 좋아한다는 점. 헤어지면서 난 마음 속으로 그 두분의 행복을 빌어 드렸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커플이 잘 맺어지기를.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AYLA 2006-04-09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제가 사는 기숙사 옆에 테니스 코트가 있는데 그 곳에서 테니스 치시는 분들을 볼때마다 마태우스님이 생각나요...^^

하이드 2006-04-09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소주도 20.1

야클 2006-04-10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우리도 둘이서 소주 7~8병을 가비얍게 희롱하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플' 소리를 듣던 때가 있었건만.....너무해요. ㅜ.ㅜ

mannerist 2006-04-10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난 왜 동대문에서 정릉까지 걸어왔을까.

주머니에 택시비 이만이천원밖에 없더이다. 걸으니 뭐. 두시간 조금 넘게 걸렸나? 근데 집에 도착해서 든 생각. 아. 젠장. 편의점에서 돈 찾아서 그걸로 택시 타고 올 껄. ㅎㅎㅎ

그나저나. 술 섞어마시는 건 둘째치고, 청년 등판이 그리 좋으심까. ㅎㅎㅎ

해적오리 2006-04-10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그럼 마태님 기준으로 전 미녀가 될 수 없다는..아쉽군요. 술을 못하는게 이런데서 걸림돌이 될 줄이야..
그나저나 정말 황사 대단하지않든각요? 전 토욜 우키요에 보러 가면서 평소 30분이면 가는 길을 1시간 10분걸려서 가면서 버스 안에서 닫힌 창을 뚫고 들어오는 매캐한 황사와 흐릿한 하늘에 정말 버스 창 열고뛰어내리고 싶었다니까요.. 오후면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 거란 일기예보 아가씨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세실 2006-04-10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참 예쁜 표현이군요.....'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플'이라~~~~
저두 백세주 좋아하는데..히

Mephistopheles 2006-04-1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든 섞어 마시면 다음날 숙취는 배로 오더라구요..^^
(그나저나 세기의 사랑은 아직 막을 안내린 듯 하군요..^^ 다행입니다..)

moonnight 2006-04-10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플>이라니. 정말 부럽네요. 잠들어버리셨어도 기분좋으셨겠어요. ^^ 섞어마시는 건 정말로 정말로 해롭죠? 저도 소주로 달리다 너무 심한가. 해서 설중매나 백세주로 바꿨다가는 담날 죽음이죠. -_-;;;

비로그인 2006-04-10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점]칵테일도 일종의 `섞어 마시기'에 속하는 것일까요? 웬지 마태우스 님께서 가장 명쾌하게 대답해주실 듯한 느낌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마태우스 2006-04-10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칵테일이란 수닭 꼬리라는 뜻으로... 조크구요, 칵테일도 섞어마시는 게 맞지만 보통 칵테일은 열댓잔씩 마시진 않잖아요. 드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달밤님/저희같은 사람은 소주로 달려야 합니다..^^ 글구 아름다운 커플을 만나서 흐뭇하긴 했지만....잠들어버린 건 ...흑..
메피님/숙취가 배로 오다니요. 아닙니다. 숙취는, 머리로 옵니다^^
세실님/님 커플을 뵜다면 그 호칭을 님에게 썼을지도...^^
해적님/그 아가씨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어요? 그, 그래도 미녀일테니...봐줍시다^^ 글구 제 미녀 기준엔 술이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매너님/평소에도 걷기를 즐겨하시면서 새삼스럽게... 동대문 정릉이면 평소 거리 아니유?
야클님/말로만 그러지 말고 한번 만나서 일곱병 마셔봅시다^^
하이드님/음, 그래서 제 주량도 조금 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병 마시던 놈이 다섯병 이렇게 마시진 못하지요^^
라일라님/전 라일락 꽃을 볼 때마다 라일라님 생각이....^^

인터라겐 2006-04-10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섞어찌게는 맛있던데요...

비로그인 2006-04-11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한 번 찬찬히...그 커플이 아주, 부럽습니다.

마태우스 2006-04-11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어머나 정말 반가워요!!
주드님/그렇지요? 저도 그랬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