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교수님 서울 가셨는데요?
잡상인스러운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다. 그러면 대부분,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서서 나가 버린다. ‘뭐야, 조교는 사람도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 방법이 편하긴 하다. 한번은 잡상인 한분이 내 얼굴을 기억했는지, 문을 열자마자 “아직도 안계시네요?” 하면서 나가 버린다. 내 얼굴이 받쳐주는 한 계속 이 컨셉을 유지할 예정.
하지만 어제 온 사람은 좀 달랐다. 서울 가셨다는 말에 “서울엔 왜 갔느냐” “언제 오느냐” “다음에 오면 만날 수 있냐” 하면서 꼬치꼬치 캐묻는다. 난 “실험하러 가셨다.” “언제 오실지 모른다.” “워낙 바쁘신 분이라 나도 잘 못본다”라며 꼬치꼬치 대답했다. 그 사람은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기생충학 책이 새로 나와서 홍보 차원으로 교수님들께 하나씩 나눠 드리고 있습니다.”
난 그의 손에 들린 책을 흘끔 쳐다봤다. 괜찮아 보였다.
“제가 받아 놓으면 안될까요?”
“아닙니다. 제가 직접 드리고 싸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사실은 제가 바로 저예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난 입맛을 다시며 그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2. 휴대폰 소리
얼마 전 ‘곰님’과 원초적 본능2를 볼 때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 난 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진동이 오는지 곰님이 몸을 움찔하며 전화를 받으려고 한다.
“아, 받지 마세요. 제가 건 거예요. 전화가 진동으로 되어 있는지 확인하느라구요.”
이건 영화보기 전 내가 늘 하는 관행 같은 거다. 내 옆사람의 벨이 울리면 나까지 민망하잖는가.
영화가 시작된 지 한시간 쯤 흘렀을까. 난데없는 타잔 소리에 난 기절할 뻔했다.
“아아아---아아아---”
그건 내 전화였다. 서둘러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사람들의 눈이 다 나에게 쏠린 듯했다. 잽싸게 진동으로 바꾸긴 했지만, 정말 무안했다. 남의 휴대폰이 진동 모드인지 신경을 쓰면서 정작 난 그대로 놔둔 것도 그렇고, 요즘은 휴대폰 예절이 그럭저럭 정착해 공연장에서 벨소리를 듣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곰님은 아마 마음속으로 이랬을거다.
“너나 잘해라 임마!”
3. 꽃
어제 모임에 온 분들 중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한분 있었다.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선생님 얘기를 하신다.
“말이야, 같은 층에 있으면서 얼굴을 볼 수가 없어! 학교를 나오긴 나오는 건지. 난 그 사람,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어.”
손예진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 선생님의 머릿속에도 지우개가 있나보다. 생각해보니 그 선생님도 나와 같은 4층, 놀래서 물어봤다.
“선생님, 저는 자주 보시죠?”
“너는 임마, 아주 가끔 봐. 그리고 너 말야, 만날 때마다 날 놀리는 거 같아. 띄워주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슬쩍 끌어내리고.”
난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아셨지?
“아네요, 선생님. 제가 선생님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말로만 그러지 말고 뭔가를 보여 봐.”
“제가 내일부터 매일 꽃 한다발씩 선물할께요.”
오늘 아침, 출근하다가 그 생각이 나서 장미꽃 한다발...은 너무 비싸니 한송이만 달라고 했다. 선생님이 방에 없으시기에 꽃을 문 손잡이에 끼워 놓았다. “선생님, 제 맘 아시죠?”라고 쓰려다 그냥 꽃만 드린 건, 남자끼리 그러는 게 남우세스러워서다. 매일은 그렇고, 한달에 한번 정도 꽃을 드리자. 선생님이 지우개를 쓰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