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테니스를 치고 집에 가던 토요일 아침, 난 갑자기 엄청난 변의를 느꼈다.

“저기, 좀 빨리 가줄래? 나 급해서 그렇거든.”

친구는 인상을 썼다.

“야, 너 한동안 잠잠하더니 갑자기 왜 그래?”

모범생인 친구는 규정속도보다 5킬로 높은 속도로 차를 몰았다. 그게 그 친구로서는 최선이었을거다.

“주, 주유소라도 세워 주면 안되겠니?”

하지만 강변도로에 주유소 같은 게 있을 리 만무, 결국 난 또다른 친구가 사는 이촌동까지 가야 했다. 그 친구의 말이다.

“나 내려주고 조금만 더 가면 파리크라상 있거든? 거기 화장실 좋아.”

그냥 화장실만 이용할 수는 없는지라 난 친구들에게 내가 빵을 사줄테니 같이 가자고 했다.


하지만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난 소파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고, 보다못한 친구가 아이디어를 냈다.

“맞아. 우리집까지 가지 말고, 조기 모퉁이 돌면 골프연습장 화장실이 있어.”

친구가 던진 휴지를 받아들고 화장실로 달려간 나는 정확히 30초 후에야 “휴-” 하고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여유가 생긴 나는 휘파람을 불면서 차로 왔고, 애써준 친구들을 위해 파리크라샹 빵을 사러 가자고 했다.

“그럴 거면 아예 밥을 먹자. 오모리찌개라고 24시간 하는 곳이 있어.”

그래서 우린, 12월 31일날의 아침을 그집에서 먹게 되었다. 김치와 돼지갈비가 어우러진 오모리찌개에다 옛날짜장을 시켰다. 하지만 그 찌개를 보니 참을 수가 없어진 나는 막걸리 한사발을 시켰고, 기분이 좋아질 무렵 그곳을 나왔다.


다시금 규정속도 모드로 돌아선 친구를 보면서 운명이란 것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몇잔의 막걸리에 긴장이 풀어진 친구가 가는 길에 사고를 냈다면 내 설사는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되버린다. 이유가 무엇이든 난 원래 가기로 했던 운명을 거슬러 다른 운명을 자초한 것이니까. 만약 그랬다면 난 두고두고 그 일을 후회하며 살아야지 않을까. 아무리 세상 일이 다 신의 뜻이라지만, 미리미리 설사를 해두지 않은 것은 분명 내 잘못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나니 날 내려준 친구가 집에 잘 갔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친구는 집에 잘 갔고, 우린 다음주를 기약했다.


* 오모리찌개를 한번 먹고나니 그 간판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띤다. 신촌에서도 봤고, 신사동에도, 그리고 대학로에도 그 식당은 있었다. 역시나 아는만큼 보이는 건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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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1-03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일도 안생기고 다들 무사히 돌아가셔서 다행이예요. ^^

깐따삐야 2006-01-0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모가리 김치찌개 참 맛있는 건데 님의 설사 이야기와 범벅해서 들으니 그 맛이 또 색다르군요. ㅡㅡ;

모1 2006-01-03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일 없어서 다행이군요. 그 고통~~~알지요.

비로그인 2006-01-03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마태우스님에게 삶의 모든 순간순간은 성찰의 대상이군요.. 전 같은 일이었어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까막득히 잊었을 듯;

비로그인 2006-01-03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하지만 잠깐동안 웃을 뻔 했습니다. 급박한 상황과 달리 님의 문체가 너무나도 재미있어서요.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면 우리가 웃는 모든 순간은 사실은 슬픈 상황들 같아요. 그래서 제가 요즘 웃을 때마다 하는 말이, `아, 정말 슬퍼’ 입니다.

하늘바람 2006-01-0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만큼 보인다 명언이네요^^

moonnight 2006-01-03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모리찌개. 처음 들어봐요. 맛있나봐요. ^^; 손에 땀을 쥐며 읽었어요. 모든 일들이 무사히 수습되어서 다행입니다. ;;

stella.K 2006-01-0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모리찌개 맛있나 봐요. 먹어보고 싶네!^^

세실 2006-01-0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얼마나 긴박하셨을까요???
운명이라고 해서, 운명적인 여인을 만나셨나? 하는 상상을 했드랬죠~~

2006-01-03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리오 2006-01-03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얼마전 따땃한 보리차가 맛있다가 홀짝홀짝하다가 급한 상황이 벌어졌어요.. 주유소가 없다는 것에 당황하다가, 급하면 통한다고 한밤중에 평소에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던 시외버스터미널을 생각해냈지 뭐여요.. 흐~ 별 효과가 없는 말이지만 님, 술과 야식을 금하시면 훨씬 증세가 나아지실텐데요....

마태우스 2006-01-04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야식..으으... 어제도 술마시고 집에 와서 라면 먹었어요.
속삭이신 분/제가 이번주는 곤란하구요..... 다, 다음주에 어떻게 안될까요. 제가 주선을 한번 해볼꼐요.
세실님/어찌나 가슴을 꼬집었는지 손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스텔라님/술이랑 같이 먹어야 제맛이 난답니다. 하여간 죄송합니다.
하늘바람님/그건 유홍준님 말인데요....
글 잘쓰시는 주드님/제 글에 어린 슬픔을 읽어내시는 님의 감수성에 찬사를 보냅니다.
여대생님/모든 일은 다 소재로 우려먹는다, 이게 제 신조지요. 신조 하니까 신조협려 생각이 나네요
모1님/그죠?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 바로 그거 아니겠어요.
깐따삐야님/호홋, 그렇군요! 하여간 반갑습니다. 설사 얘기 덕분에 님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네요
바람돌이님/특히 제가 다행이죠. 차 안에서 실수라도 했었어봐요. 한 5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