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미치게 하는 남자>를 보려고 상영관을 뒤졌다. 이런, 개봉한 지 겨우 일주일인데 웬만한 극장에서는 간판을 내렸다. 결국 난 프레야타운 11층에 있는 MMC에 쫓아가 겨우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주인공 남자만큼 광적인 야구팬은 아니지만, 그래도 준 매니아 정도는 되는지라 스크린에 조니 데이몬이나 페드로 마르티네스 등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한번씩 스쳐지나간다는 것, 그리고 주 무대가 보스톤의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라는 사실이 마냥 좋았다. 영화 스토리가 말이 안되고 드류 배리모어가 내 타입이 아니라해도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공같은 야구팬이라면 당연히 애인도 야구팬 중에서 찾아야지 않을까 싶다. 야구를 싫어하는 사람이 경기장에 앉아있는 것, 그것만큼 괴로운 일이 또 있을까. 축구는 물론이고 오페라나 발레도 정해진 시간이 있지만 야구는 도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잖은가. 영화가 끝나고 지하철을 타려다 프레야타운 근처에 있는 우동집을 지나갔다.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그곳에 내 여친은 없었다*. 갑자기 쓸쓸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난 요즘 가을을 탄다. 애인 유무에 관계없이, 그전까진 단 한번도 가을이라 외로워 본적이 없었다. 난 그걸 평소 사람들 속에 파묻혀 지내는 탓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내가 지금껏 잘 지냈다면 그건 오로지 벤지 때문이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89년 2월 처음 만나서 줄곧 내 곁에 있어준 벤지, 올 가을은 그러니까 혼자 지내는 첫 번째 가을인 셈. 그래서일까. 요즘 가끔씩 벤지가 꿈에 나오고, 잠에서 깨면 벤지의 공백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벤지가 보고 싶어 울어본 것도 오랜만이다. 녀석은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을까. 내가 자기를 못견디게 보고 싶어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개를 한 마리 더 키워보라는 사람은 있지만, 벤지를 대신할 수 있는 개는 세상에 없고, 누군가와 정이 들고 또 떠나보내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를 알기에 그러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내가 요즘 부쩍 스카페타 시리즈에 탐닉한 이유도 사실은 재미있는 소설에 빠져 10월을 견뎌보고자 하는 속셈, 콘웰의 소설은 다행히 내 기대에 부응해 줬고, 그녀의 남은 소설을 다 읽을 때쯤엔 10월도 거의 다 지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에게 옷을 벗어주고 “내일 뭐입지?”를 외치는 광고모델처럼 국내에 번역된 콘웰의 마지막 소설을 읽고 나서는 “이제 뭐 읽지?”라고 소리칠지 모르겠다.
클리블랜드라는 야구팀은 늘 꼴찌만 하는 팀이었다. 시즌 초반만 지나면 이미 꼴찌가 확정되다시피 하던 그 팀은 <메이져리그>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놀랍게도 그 영화가 나오고 난 뒤 클리블랜드는 갑자기 강팀으로 거듭나 번번히 지구우승을 차지한다.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가지는 못했어도 1999년의 클리블랜드는 가히 메이져리그 최강의 팀으로 군림했었다. <날 미치게 하는 남자>는 1918년 이후 86년 묵은 밤비노의 저주를 지난 시즌에 풀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차라리 이게 2-3년쯤 전에 만들어졌다면 더 좋을 뻔했다. 그랬다면 영화가 저주를 푸는 데 기여했다는 말도 들을 수 있고, 보스톤 팬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더 중요한 건, 보스톤이 월드시리즈에 오를 때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되었으리라는 것. 벤지가 유난히도 보고싶은 밤, 미국야구 포스트시즌은 저물어만 간다.
* 그곳에 있는 우동집이 내 여친네가 하는 가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