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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버빌가의 테스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고전총서: 서양문학 16 ㅣ SNUP 동서양의 고전 20
토머스 하디 지음, 김보원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사회에는 세계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고전은 중고교 때 섭렵해야 한다는 통설이 있는 듯하다. 나이든 사람들 중 <돈키호테>같은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일 텐데, 그러다보니 지금사 <죄와 벌> 같은 걸 읽는 게 영 쑥스럽다.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명작 시리즈 몇 개를 샀지만-최종 목표는 그 시리즈 100권을 다 사는 거다-<양철북>을 제외하고는 그냥 쌓아놓기만 한 이유도 남들 눈이 꺼려진 나머지 손이 잘 안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남는다. 나처럼 그때 고전을 못읽고 지나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안읽고 지나간다. 둘째, 집구석에서 읽는다. 셋째, 남들이 뭐라그러던 갖고다니며 읽는다.
첫째는 영 찝찝하고, 집구석에서 읽는 시간보단 출퇴근 시간에 읽는 게 대부분이라 둘째도 가능성이 희박하다. 남은 것은 셋째, 마침 존경하는 파란여우님으로부터 <테스>를 선물받은 김에 닷새 전부터 읽기 시작해 어제, 술을 마시러 가던 지하철에서 대망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다.
고전이 다소 지루할 거라는 편견과 달리 책은 참으로 재미있었는데, 밀밭 가는 소리를 “베짱이가 애인 부르는 소리”라고 비유하는 등 저자의 풍부한 표현력은 시종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거와는 별개로 이 책을 읽으면서 고전읽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는데, 이런 책은 중고교 때 읽어도 의미가 있겠지만, 나이가 든 뒤에 읽으면 그때와 또 다른 맛이 있었다. 강제로 순결을 빼앗긴 것이 여자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굴레가 되는 어이없는 현실은 내가 자라면서 보고 들은 몇몇 사례들을 떠올리게 하고, 남자와 서로 사랑하면서도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테스의 안타까운 마음은 부모의 반대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몇몇 커플을 생각나게 했다.
굳이 다른 사람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책을 읽으면서 내가 만나고 떠나보냈던 여인들의 얼굴이 여럿 떠올랐는데, 다시 말해 중년의 이런저런 경험은 등장인물의 심리를 이해하는 폭을 넓혀 줬다. 그래서 난 시종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는데, <테스>를 순결의 의미가 보다 컸던 사춘기 때 읽었다면 테스의 처지에 공감하기보다는 당시 배웠던 윤리에 맞춰서 “여자가 몸을 함부로 굴렸다”고 그녀를 비판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책으로 간접경험을 한 뒤 나중에 여러 일들을 겪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삶을 어느 정도 산 뒤에 읽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테스>를 계기로 잃었던 고전에의 꿈이 되살아나게 되었으니, <적과 흑>, <브란덴브루크 사람들>을 비롯한 고전들을 남들 눈 신경 안쓰고 읽어볼 생각이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며 읽혀 온 책들은 한두달 전시되다 사라지는 요즘 책들과 뭐가 달라도 다를 것이며, 무디기 짝이 없는 내 감성의 폭을 넓혀 줄 것으로 생각한다. 늘그막에 고전을 다시 읽고 싶어진 이유다.
* 덧붙이는 말.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의 <테스>가 개봉된 것은 내가 중학교 때의 일이다. 관람불가여서 못봤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스에 대한 묘사를 읽을 때마다 나스타샤 킨스키의 얼굴이 떠올랐다.
** 아버님 서가에 꽂혀있던 이 책을 딱 한번 들춰본 적이 있다. 야한 장면에 굶주렸던 시절이라 테스가 남자에게 당하는 구절을 읽고 싶어서였는데, 그때 무지 실망해서 그냥 책을 덮었던 생각도 난다. 지금사 그 구절을 다시 읽어보니 정말 실망할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