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인들은 별 관심이 없겠지만 지금 의과대학에서 논의되는 현안 중 하나가 바로 의학전문대학원이다. 지금은 6년의 과정을 마친 뒤 의사 자격증을 주었다면, 앞으로는 미국처럼 일반대학 4년을 마친 학생을 뽑아 의사로 만들겠다는 것. 그걸 추진하는 정부도 나름의 명분이 있을테고, 반대를 하는 의과대학들도 각자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교육과정의 변화를 의대 쪽에서 먼저 추진하는 게 아니라 정부가 당근과 채찍을 동원해가며 한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작금의 세태는 이 제도가 진짜로 의학발전에 기여하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어차피 의학을 배우는 기간(4년)은 똑같은데 예과 대신 일반대학을 다녔다고 의사수준이 올라간다는 논리는 해괴하기 그지없다.
누구 말이 맞는지간에 우리 학교 역시 의학대학원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의대교수들 대부분이 반대를 함에도 불구하고 교육부에서 돈과 인력을 지원해주기를 기대하는 학교 측에서는 의대측의 반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의학대학원 추진 위원회. 도대체 왜 반대를 하는지 납득을 좀 시켜달라는 취지다. 교수 다섯이 위원으로 뽑혔는데, 그 중 하나가 나다. 더 안타까운 일은 내가 그 위원회의 간사가 되었다는 것. 학과장을 맡고 있어 나름대로 바쁜데, 간사까지!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나를 제외한 세명은 60대, 나머지 한명은 40을 훌쩍 넘긴 연배, 나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간사라는 것의 정의는 ‘중심이 되어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관련된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이 간사다. 두달쯤 전, 본부 기획실장 주재하에 열린 회의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견해를 내세웠지만, 최종 결론은 이거였다.
“다음 회의는 9월 9일 금요일날 하구요, 그때까지 자료를 꼼꼼하게 준비해 옵시다. 외국이나 다른 대학의 자료도 포함해서요”
위원 모두가 아무 일도 안하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갔다. 다들 평온한 표정이었지만 속이 타는 건 나였다. 왜? 간사니까! 회의를 보름쯤 남겨뒀을 무렵, 몸이 달은 나는 위원 중 하나를 찾아가서 하소연했다.
“저, 자료준비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그분의 명쾌한 대답, “열심히 해야지!”
걱정이 되어 잠이 안올 지경이 된 나는 술을 마시며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러던 날, 기획실장이 전화를 걸었다.
“다음주 회의 있는 거 아시죠?”
“네...”
“준비는 잘 되고 있나요? 미리 자료를 만들어서 배포하는 게 좋겠는데..”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더더욱 심란했다. 나 혼자 이렇게 걱정할 거라면 위원은 왜 다섯이나 뽑았단 말인가. 그날도 난 원래 마시려던 것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셨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 일도 안한 건 아니다. 지도교수를 찾아가 자료를 빌려왔고, 각 대학에 있는 아는 사람에게 정보를 캐내려고 노력을 했다.
“너희 학교에서 회의한 자료 있으면 좀 줄래?”
인터넷도 뒤졌고, 교학과에 가서 아쉬운 소리도 했다(그래서 월척을 건졌다). 그렇게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장황한 보고서를 쓰고 있는 중인데, 이번주 수요일과 목요일에 술약속을 잡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내가 얼마나 초조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때는 천안에서 밤을 샐 각오까지 되어 있다.
시작이 반이고, 어느 정도-현재까지 9장-보고서를 만들고 나니 마음이 좀 놓인다. 그렇긴 해도 좀 억울하다. 안그래도 학과장 일 하느라, 술 마시느라 바쁜 나한테 간사를 맡기고, 나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있는 사이 남들은 “회의가 이번주야?”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도 억울해서 아는 선생한테 하소연을 했더니 그가 이런다.
“원래 세상 일이 다 그렇지 뭐”
으이그, 퍽도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