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연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어제 난 술약속이 있었다. 평소와 달리 약속장소로 가는 내 마음은 그다지 편치 않았다. 14일날 발표할 게 있어 자료를 정리해야 했기 때문.
“금요일날은 특강 때문에 일 못하고, 주말엔 놀아야 하고, 월요일은 얘들 MT 따라가고, 화요일은 미녀랑 술, 수요일날도 술 약속이 있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난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다시 학교로 들어왔다. 그때가 7시 50분, 난 이미 잃어버린 줄 알았던 집중력을 끄집어내 일을 했다. 집에 가지 말고 밤을 샐까 하다가, 일되는 걸 보니 안그래도 될 것도 같아 택시를 불렀다 (천안은 밤에 버스가 끊긴다). 그때가 10시 40분, 원래 기차역으로 가려다 갑자기 욕심이 생긴 나는 행선지를 바꿔 KTX 역으로 가달라고 했다. 기차는 11시 반에나 있는 반면, 전화로 확인 결과 10시 54분에 떠나는 KTX가 있었기 때문에. 택시 아저씨는 핸들을 굳게 쥐더니 곡예운전을 시작했다. 비상깜빡이를 켠 채 고속으로 달린 것은 당연하고, 신호 무시하기, 우회전했다가 유턴해서 다시 우회전하면서 사거리 건너기 등 각종 묘기를 선보인 끝에 정확히 53분에 날 역에 내려줬다. 죽어라고 매표 창구로 달려가니 웬 남녀가 표를 사고 있다. 난 “54분 용산!”을 외쳤지만, 기차는 이미 떠난 후였다.
‘에이 씨, 5천원이나 더 주고 달렸는데...’
한탄을 하고 있는데 앞에 서있던 여자가 아는 체를 한다. 고개를 든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내가 전에 사귀던 여자였다.
좀 심한 것 같지만 난 한때 13살 연하와 사귄 적이 있었다. 온양에 살던 그녀 때문에 천안-온양 일대에서 많이 놀았었는데,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보다 그녀가 날 좋아하는 게 훨씬 커서 그런지 난 그녀에게 그다지 잘해주지 못했다. 겨우 일주일에 한번 만나주면서 피곤한 티는 다 냈고, 져줘도 될 언쟁을 끝까지 우겨가며 말싸움을 했다. 예컨대 LG를 옹호하는 그녀가 LG 선수의 잘못을 감쌌던 반면, 두산을 좋아하던 난 그 선수가 나쁜 놈이라고 박박 우겼다. 한두시간도 아니고 한 이틀을 그 문제로 싸웠으니 감정이 상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 LG 선수는 나쁜 놈이다. 제구력이 안되서 타자 머리를 맞히는 건 그렇다쳐도, 왜 선수 발을 걸어 십자인대를 끊어 놓는가?)
오래 전부터 난 그녀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었다. 헤어지자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이메일은 좀 잔인한 것 같아서 만나면 얘기해야지 하다가, 막상 만나면 말을 못하고 집에 가는 나날이 몇 달은 계속되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니면 일방적인 사랑에 지쳤는지 그녀는 어느날 그만 만나자고 얘기했고, 난 마음 속으로 ‘미안해’라고 중얼거렸다. 그 뒤 한번도 연락이 없었는데 어제 만난 거다.
솔직히 그녀가 날 못봤다면 난 그냥 도망가버렸을거다. 그녀에게 빚을 진 나로서는 마음 편히 그녀에게 아는 체를 하지 못했을 테니까. 두달 전에 온양에 갔을 때, 혹시나 그녀를 만날까봐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했었는데 늦은 밤 역에서 만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