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배낭을 메고 학교에 다닌다. 뭘 많이 넣을 수 있고, 어깨에 멜 수 있다는 점에서 난 배낭만을 선호한다. 오랜 세월 배낭에 길들여져 이제 다른 가방은 갖고 다니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친구 하나는 내 배낭을 볼 때마다 더럽다고 난리다. 내가 봐도 때가 잔뜩 낀 내 배낭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겐 배낭 말고도 긴 끈이 달린, 네모났고 조그만 가방도 있다. 너무 작아서 책 두권을 넣으면 끝인데, 워낙 귀티가 나는 가방이라 아껴 쓰고 있다.


지난 토요일, 그 가방을 들고 나갔다가 그 안에서 편지 한통을 발견했다. 보니까 내가 전에 썼던 편지다. 친구에게 보내려고 썼다가 친구가 이사갔다는 얘기에 ‘주소를 확인하고 써야겠다’며 그 가방에 쳐박아 뒀던 것. 편지 쓴 날짜가 2002년 1월이니, 벌써 3년 전이다. 편지에 썼던 구절 중 몇 개만 옮겨본다.

[아버님 빈소를 찾아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거기 와준 많은 친구들 중 네가 가장 고마웠던 건, 네가 어려운 걸음을 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편지를 쓴 건 그러니까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열흘 정도 시간이 흐른 뒤다. 그러고보니 이 친구가 빈소에 왔던 기억이 난다. 편지에 쓴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걸음을 해준 친구 앞에서, 난 그만 울고 말았었다. 물론 그 기간 중 겁나게 많이 울었지만, 그 앞에서 운 건 또 다른 의미였을거다.


[동기회 때 네가 내 옆에 앉았었지. 술 마시지 말라고 날 걱정해 주던 너, 그 말 때문인지 난 지난 12월 별로 술을 마시지 않고 흘려보냈다....그간 내 사전에 없던 ‘적당히’를 내 생활철학으로 삼을게. 술 적당히 마시고, 집에 일찍 들어와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그런 삶을 살아야겠어]

내가 그 전해 12월에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순전히 아버님이 위독하셨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중환자실에 계셨고, 하루 두 번의 면회만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난 친구들과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왔다.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옷을 챙겨 입은 시각은 새벽 4시쯤. 명백한 음주운전으로 병원에 차를 몰고 갔었다. 심장박동수가 50에서 10, 그리고 0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난 이게 꿈일까 살을 꼬집어야 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적당히’는 아직도 내 생활 철학이 아니며, 여전히 난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있다.


편지는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갑자기 왠 통일 얘기를 했을까. 편지란 건 원래 다시 읽어보면 유치해 보여, 보내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때 난 이 편지를 다시 읽어봤음에 틀림없고, 영 마음에 안들어서 주소 핑계를 대면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 편지를 그냥 보냈어야 했다. 이 편지를 보냈다면 내 성격상 몇 번 더 편지를 보냈을 것이고, 내 편지들은 친구의 삶에 위안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편지를 안보냄으로써 난 그 뒤 한통의 편지도 쓰지 못했다.


뒤늦게 발견한 이 편지를 지금은 부칠 수가 없다. 아버님의 뒤를 따라 내 친구도 하늘나라로 갔기 때문에. 그게 벌써 작년의 일이다. 아버님께 잘 못해드린 걸 뒤늦게 후회하는 것처럼, 난 그가 암과 싸우는 동안 별반 도움이 못된 것을 후회해 본다. 그래도 내가 편지 하나는 잘 쓰는데. 내 딴엔 유치하게 썼다고 생각해도, 내 편지 받은 애들이 다들 좋아했었는데.


편지를 발견하기 전까지, 난 꽤 오랫동안 그를 잊고 지냈다. 편지 때문에 다시 부활하긴 했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낼 수 없을 때가 되어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있는 사람들에게 잘 해야겠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인내심이 없어지는 자신이 무섭지만, 그래도 노력은 하련다. 부치지 못한 편지를 붙잡고서 마음 아파하지 않기 위해서. 일단 가서 어머님 어깨나 더 주물러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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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04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어머님 어깨나 더 주물러 드려야겠다에 올인!

숨은아이 2005-04-0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내지 못한 편지가 이젠 보낼 수 없는 편지가 되었군요. 가슴이 아파요.

울보 2005-04-0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가신분들이 그곳에서 편안하시기를 그들도 남아있는이들이 편하기를 바라겠지요,,,,,

하루(春) 2005-04-05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퍼서 눈물 나요.

클리오 2005-04-05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아프네요. 그래도 마태님은 고마운 친구에게 편지를 쓰실 줄 아시는 따뜻한 분이시군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한번 돌아봐야 되는데....

비발~* 2005-04-05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잉.... 갑자기 마태님 편지를 받고싶다...

stella.K 2005-04-05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처음 알라딘 오프 모임에 갔었을 때도 마태님 어깨에 매는 가방을 어정쩡하게 들고 계셨던 것 같았는데...그때 저 마태님 보고 놀랐어요. 동안이어서. 누가 마태님을 아저씨로 보겠어요? 늦게 대학에 갓들어간 고학생쯤으로 보지. 하하.
마태님은 엉뚱한 게 매력이어요. 말씀하신 그 친구 누군지 알 것 같네요. 오늘 글은 유난히 소년 같으시네요. 오해 마세요. 좋다는...(잉? 뭐라고 해야하지?) 어쨌든 짠한 글이어요.^^

로드무비 2005-04-05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편지 저에게라도 보내실래요?
답장 쓸게요.

마태우스 2005-04-05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비님/아네요. 부끄러운 내용이 많아서 못보내겠어요...... 다시 써서 보내드릴 순 있어요
스텔라님/제가 동안이라뇨. 아저씨 그 자체로 보이죠!! 스텔라님이야말로 동안!
비발님/제가 편지 써드릴까요??? 희한하네. 갑자기 편지 쓰고 싶네...
클리오님/편지 쓰는 거, 노력에 비해 받는 기쁨은 훨씬 크더라구요. 그래서 전 가끔 편지를...하핫. 근데요, 그건 제가 사람 사귀는 스탈이구, 다른 것보다 더 좋을 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루님/그죠. 저도 이 글 쓰면서 마음이 너무도 쓰려 왔어요.
울보님/님 말씀대로 그곳이 편안해야 할텐데요...
숨은아이님/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다시금 생각납니다.
고양이님/그러고보니 님과도 술 한잔 해야 하는데.............
새벽별님/음, 갑자기 엄마 어깨 주물러 드리니까 엄마가 참 좋아하셨어요. 주무시다 일어나셨는데두요^^

하얀마녀 2005-04-1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기도 그렇고 편지도 그렇고. 어째 자기가 쓴 글은 마음에 드는 글이 별로 없죠. 마음이 짠해지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