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쥴님의 인기에 편승해 보고자 제목을 이렇게.......
할머니를 댁에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 양화대교를 건너는데 왼쪽 차의 창문으로 개 한 마리가 고개를 빼고 있다. 바람을 맞으며 봄을 만끽하는지, 아니면 한강의 풍경을 감상하는지. 가지런히 빗겨진 털이 바람에 날리고, 행여 추울까봐 옷을 입혔다. 보나마나 그 개는 사랑받을 것이다. 먹이와 물은 언제나 가득하고, 녀석이 하는 일이라고는 재롱을 피우거나 잠을 자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흐뭇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며 합정로터리를 건너던 나,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만다.
“아아아------------악!”
한 5초 가량 비명을 질렀던 것 같다. 도로에 개 한 마리가 내장을 내놓은 채 죽어 있었던 것. 그 개는 건널목도 없는 8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려 했을 것이다. 자신이 있는 곳이 영 마땅치 않아서. 마실 물도, 마땅히 먹을 것도 없어서, 길 건너에 가면 이곳보다는 낫겠지,라는 생각을 했고, 쌩쌩 달리는 차를 피해가며 반대편으로 가려 했던 이유가 그것이리라. 하지만 그 개는 모르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편에 가봤자 상황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서울이란 도시는 버려진 개들에게 지극히 냉담하며,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된 이후 거리의 개들이 먹을만한 건 없다는 것을.
종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두 개의 운명은 너무도 틀렸다. 가족 모두한테서 사랑받으며 삶을 즐기는 흰 개, 그리고 수명을 채우지도 못한 채 차도에서 죽어간 검은 개. 죽는 순간 검은 개는 생각했을 것이다. ‘쟤가 나보다 나은 게 뭔데?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틀린 건데?’
사람이라고 별로 다를 건 없다. 축복 속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호의호식을 하는 애가 있는 반면,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맡겨지는 아이도 있다. 부자집 애가 세상은 사랑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고아원의 아이는 따뜻함이 뭔지도 모른 채, 인생은 처절한 싸움이라고 생각하며 앵벌이에 나설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역전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십년 후, 이십년 후의 자기 모습을 그리는 부자집 애와 달리, 오늘 먹을 양식을 걱정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인생이 단 한번 사는 것이라면, 어떤 줄을 잡고 태어나는가에 따라 인생이 좌우되는 것은 너무도 불공평하다. 국가가 그 불공평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어주면 좋겠지만, 우리 정부는 그런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 빈부격차를 내세워 정부를 공격하던 언론들은 난데없는 ‘복지병’ 타령을 하며 형식적인 복지마저 가로막는다.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게 힘든 이유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가진 자들을 끌어내리려 해서’가 아니라 못가진 자들을 짓밟는 사회구조 탓이다. 우리 사회가 나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그 속도가 너무도 느리다. 안그래도 한참 뒤처진 마당인데.